오전에는 노교수의 연구실에서 날이 슨 책에 허리를 굽혔다. 다음 수업을 들으려 언덕을 넘고 항시 검은 양복을 입는 오 선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책에 수많은 저녁들이 한 줄 한 줄 떨어졌다. 글들의 무게가 층층이 쌓였다. 문득 검지를 펴서 여백을 먹고서, 가슴까지 갈라진 상처, 지문을 타고 내려온 가슴까지 갈라진 상처를 볼 줄이야.
저녁에, 아픔을 쏟아내는 지문은 상처가 될 것이야. 수 만개의 상처가 공돌아서 지문이 되고, 살점을 긁고서 책은 세월이 되고, 찬찬히 원고를 찢으며 꼭 그만큼 글자를 굄 한다.
태어나서 울기 전에는 아무도 몰라, 그이가 울기 전에는 담벼락이 가난하지 않았을까나. 내 가슴이 아롱이 젖기 전에는 우리는 눈물을 몰랐다.
벗이 더 이상 밤이 오지 않는 밤의 강에서 나이를 모두 털어내고 사라지면 그 만큼 서른 울음으로 만난 것이다.
그는 살지 않고 숨 쉬고 싶다 하였던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가을에 색이 없는 낙엽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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