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좋아하는 것을 비주체성 및 비독립성의 발로라고까지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유행은 나에게 더더욱 배격해야 할 대상이었다.
내 젊은 시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크게 유행했다. 그 당시 아마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고 생각된다.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곤 하던 나는 유행이라고 생각하면 일단 거부의 태도를 취했다. 남들이 다 가는 곳에 나는 아니 간다!
그리고 또 황석영이 유행이었다. ‘객지’ ‘삼포 가는 길’ ‘장길산’으로 그는 70년대 우리사회의 등에 역할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말까지의 그의 사회 참여적ㆍ비판적 행적은 주지의 사실이다.
90년대 들어와 나는 점차 유행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했으며, 유행 속에도 진리ㆍ진실이 들어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보인 게 아니니까.
90년, 나는 독일에서 돌아와 곧바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샀다. 그러나 황석영의 방북(89년), 그 후 독일ㆍ미국 체류, 귀국(93년), 뒤이은 형무소 생활, 석방 등의 파노라마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황석영은 과시적인 허영심에 휩싸여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단순히 과시적인 허영심으로 수십 년간 같은 발걸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거기에다 번뜩이는 글재주와 치밀한 사고력을 겸비한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황석영은 70년대 초 간척공사장, 구로공단 등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경험은 ‘객지’ ‘삼포 가는 길’에 녹아 있으며, 74년 이후 한국일보에 ‘장길산’이 연재되는 동안 해남, 광주로 이주해 생활하고(76~85년), 그 당시 광주민주항쟁을 체험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황석영은 70ㆍ80년대 우리사회의 얼굴이다. 아니, 우리들 대부분이 부정ㆍ비판의 생각을 겨우 혼자말로 중얼거릴 때, 그는 스스로를 혼돈의 소용돌이 와중에 내맡긴 채 중심을 잃지 않고 횃불을 높이 치켜 든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황석영의 훌륭함은 우리의 사회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헤쳐 간 데에만 있는 게 아니다. 황석영은 이제 새로이 형성되는 사회구조 및 세계문명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재충전하며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해야만 한다는 명확한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자신의 토로를 통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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