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30분. 국회 정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국회로 들어가려는 시민, 혹은 기자들과 이를 막는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오늘은 국회 출입증이 없으면 못들어간다”고 완강히 막아서는 경찰들. 민주노동당이 10시에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기자회견’을 개최하지만 이 날만은 기자 중에도 국회출입기자만 들어갈 수 있단다. 일반인들에게 당당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일까. 혹시나 출입증 없는 ‘일반인’이 들어갈지 몰라 차량점검까지 꼼꼼히 하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서 ‘쌀비준 반대’ 팻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하는 농민의 모습이 쓸쓸하기만 했다.
오전 10시. 국회 정문 너머 계단에서 민노당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소속의원, 비대위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비준안 처리를 막겠다”고 다짐한 뒤 국회로 들어갔다.
한 시간 뒤 국회 앞 국민은행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쌀 비대위, 전국민중연대의 ‘쌀협상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시민단체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전국민중연대 전광훈 상임대표는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쌀 비준안을 강행처리한다면 국회와 정부 껍데기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모두 “노무현정권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농민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직시하고 쌀협상 비준 이전에 먼저 농업과 농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며 주장하고 기자회견을 마쳤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이 기자회견이 끝나자 주변에 대기해 있던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진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후 2시에 같은 장소에서 민노당과 민중연대, 쌀 비대위의 결의대회가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열린 농민대회에서 경찰과 농민간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인지, 경찰은 각 지방에서부터 농민의 상경 자체를 막아 투쟁은 전국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날 결의대회도 서울 인근 수도권에 있는 각 시민단체들과 대학생들만의 소규모 참가가 예상됐다. 하지만 경찰은 보다 단단히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 결의대회가 시작됐다. 약 200명가량의 소수만이 참여해 “12월 중순에 열릴 WTO 협상 이후로 비준안 통과를 미뤄라” “식량주권만은 뺏기면 안된다” 등을 목이 터지게 외쳤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국회 정문 앞 넓은 도로에 쓸쓸히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 시간, 길 건너 국회에서는 본회의가 개최되려는 중이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쌀 비준안 처리 안건을 가장 처음으로 올려놓은 채, 민노당 의원들과 보좌진들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못 들어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웃지못할 일에, 민노당 의원들이 곧 본회의장 진입과 의장석 점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2시 40분 즈음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민노당 의원들을 의장석에서 끌어내리는 등의 몸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3시 10분을 전후해 쌀협상 비준안 찬반표결이 실시됐다. 그리고 채 5분도 안돼, 총 223명 중 △찬성 139 △반대 61 △기권 23으로 비준안이 통과됐다.
결의대회장에 곧 이 소식이 들려오자 대회 참가자들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곧 쌀협상 국회비준 반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이 순간부터 노무현 정권 타도투쟁에 돌입할 것”이라며 “수입쌀이 이 땅에 들어올 수 없도록 죽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대회에 참가한 항공대 강동기 총학생회장은 “이 사실을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알리고 다음달 1일 열릴 전국농민대회때 함께 연대투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준안 통과 후 대열은 국회 모형을 태우는 상징의식을 행한 뒤 국회 진입을 시도 했지만 경찰에 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농민가를 부르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만이 대한민국 350만 농민들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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