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만을 위한 ‘법질서’ 밀어붙이기는 시민 저항 불러일으킬 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지났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경제살리기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 종합부동산세 무력화, 사회복지의 축소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정책들 뿐이었다. 또,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한국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과거 군사정권이 애용했던 공안통치로 집회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이번 기획은 이명박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초래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을 법,경제,사회,언론 등 네가지 분야로 나누어 다룬다.                                                                                                                                       편집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지난 해 촛불집회에서 학생이건 어른이건 가장 많이 부른 노래의 이 제목은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 헌법의 제1조 제1항이다.

‘떼법 청산! 엄격한 법치주의 확립!’ 이것은 촛불집회와 미네르바 구속,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조중동 같은 언론이 가장 열심히 외치고 있는 구호이다. 법무부는 연간업무보고에서 법질서 확립을 제1의 업무로 잡았고, 로고송까지 만들어 준법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겉으로만 보자면 이 둘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법치주의는 민주공화국을 구현하는 원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법치주의가 아닌 인치주의나 다른 무엇으로 운영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촛불들의 노래 앞에 ‘누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 아니래?’라거나 정부의 캠페인을 듣고 있다.  ‘누가 법 지키지 말제?’라고 되물을 때, 각자가 생각하는 두 개념의 의미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통제돼야 할 것은 ‘권력’

공화국(republic)은 주권이 군주나 세습귀족 등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시민들에게 있고, 직간접으로 시민들이 선출한 대표자에 의하여 행사되는 정체(政體)를 말하고, 주권이 어느 한 계급이나 계층으로 제한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다른 계급과 계층, 세력이 글자 그대로 공화(共和), 즉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공화국은 이해관계가 다른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한편 법치주의는 정부의 권한이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독단이 아닌 적법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제정된 법률에 맞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리로, 이를 통해 법의 규율을 받을 자에게 법적 안정과 예측가능성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법치주의는 절대군주제의 전횡을 제한하려는 시민들의 저항에서 탄생한 것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조직이나 기능이 견제와 균형, 국민대표자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 규율될 것을 요구한다.

곧, 법치주의는 ‘법을 지키자, 말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자가 제 멋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투명하고 공정한 적법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원리로, 국민이 아니라 그 반대로 권력자를 통제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처럼 법치주의의 구속을 받을 이명박 정부가 스스로 법치주의의 확립을 부르짖고 있어 놀랄 일이지만, 그 속알맹이를 알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라 분노할 일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엄격한 적법절차의 통제를 받겠다는 게 아니라 주권자이자 기본권의 담지자인 국민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또 약한 자, 없는 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 강한 자, 있는 자를 위한 법을 강요함으로써 공화국의 정체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 모습  

법치는 표현자유 전제돼야

공화국은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세력이 공존하므로, 이들은 자신의 입장이 관철된 법규범을 만들어 전체에게 통용시키고자, 곧 정치적 다수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공화국의 법은 당대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절충되고 조절된 규범으로서 여러 집단의 당시 역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성장하여 다수자가 되면 이들의 입장이 반영된 법이 전체의 규범으로 공표되고 집행되지만, 그 세력이 쇠락하면 반대세력이 다수자가 되어 새로운 다수의 입김이 투영된 법으로 개정된다. 곧 공화국의 법은 여러 집단의 성장과 쇠락에 따라 수시로 바뀌며, 통념처럼 영원불멸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하지만, 공화국의 법이 ‘공화국’의 법으로 유지되려면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은 논리필연적이다. 그 하나는 공존이다. 이는 정치적 다수자가 소수자를 절멸에 이르게 할 정도로 압도적 지배력, 독점적 지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집단이 사실상 모든 자원과 부, 지위와 권한을 차지하는 양극화사회라면, 어떻게 조화와 공존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 헌법 전문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도록 규정하고, 제10조가 모든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도 공존을 전제로 하는 공화국의 가치를 반영한 것이다.

공화국의 법이 ‘공화’롭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은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어느 한 집단이 다수자 지위를 영구화하지 못하도록, 소수자가 언젠가는 다수자가 될 수 있도록 절차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경쟁을 정치적 다수자가 되기 위해 다른 세력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여론형성이라 일컫는데,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와 여론형성수단에의 접근가능성 같은 실질적인 여건의 구비는 소수자가 장래의 다수자가 되기 위한 초석이다.

우리 헌법이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와 검열,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를 금지하며 그 자유를 거의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 부르는 것도 누구든지 장래의 다수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토머스 에머슨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권리는 민주사회의 근본원칙으로 간주해야 한다”거나 “집회의 자유는 ‘없는 자’에게 최후의 보루”라 했던 것도 같은 연유다.

강자 편 기운 ‘법치주의’

그런데, 현 정부는 출범 후 1년 동안 부자들을 위한 각종 감세법안을 통과시켰고, 스스로 종합부동산세의 위헌을 거론하며 부동산부자들을 비호하였는가 하면, 수돗물과 의료의 민영화를 통해 돈 없으면 물도, 의료도 공급받지 못하게 하고, 재벌의 은행소유를 허용하여 국민의 예금을 재벌의 사금고로 이용할 길을 터주며, 최저임금을 더욱 낮추고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양산하고자 이른바 MB악법을 통과시키려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양극화 사회가 더더욱 강자의 편으로 기울어져 공화국의 법이라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이익의 탐욕에 눈먼 건설자본과 이에 결탁한 정치인들의 협잡이 빚어낸 균형추를 잃은 우리 사회 비극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법이 사회가 정치적 소수자가 다시 다수자가 될 수 있는 공정한 경쟁의 여건을 보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중동이 신문시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명박 정부는 신문사의 방송겸영을 허용하는 언론관계법 개정으로 기득권층이 방송까지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여는가 하면,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하겠다, 마스크착용금지법을 제정하겠다며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발상에만 목매달고 있으니, 공화의 기본수단마저 목 조르고 있다.

미네르바의 구속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싶은 이발사의 입을 막으려는 전제군주제에서나 있을 법한 비웃음거리다.

그런데, 법무부에 제출된 산업정책연구원의 '66개국 법질서 경쟁력' 조사결과는 정치인과 기업, 정부보다 시민 부문이 월등히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최근 불거진 여러 사회질서 문제들의 원인이 시민의식보다는 정부나 정치인, 기업에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라 적혀 있다. 가관인 것은 그 연구결과에 당혹한 법무부가 내용을 보완하라면서 보고서를 반려하였다는 점이다.

법질서 확립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으로 '떼법'이나 '불법시위' 등을 지목해 온 정부가 기대와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자 이를 감추기 위해 반려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이명박 정부의 법치주의, 준법질서캠페인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국민에게 준법을 요구하고 법을 위반한 국민을 엄벌한다고 해서 법치주의가 확립되지는 않는다. 국가 스스로, 정부 스스로 자유·평등·정의라는 공화국의 이념에 맞게 다양한 이해와 가치, 견해를 조정하고 조절하며, 법 집행의 근본목적을 고려할 때, 비로소 ‘법치’를 거론할 수 있고, 국민에게 준법을 요구할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

-황희석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민주 변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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