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준(문창4) 作

개밥바라기

최병준(문창4)
등장인물

이미연 (여, 43) - ‘상사화’의 포주.

김시후 (남, 43) - 저승사자. 죽은 미연의 남편.

강모경 (여, 37) - 삼십대의 미연. / 뚱뚱하고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

이미나 (여, 28) - 이십대의 미연. / 몸매 좋고, 도도하며, 파마가 세련된, 아가씨.

김수정 (여, 17) - 십대의 미연. / 아직 잘 모르는, 눈이 큰, 소녀.

 

무대

 

철거를 앞둔, 집창촌 골목의, 한 가게. ‘상사화’

많은 업소들은 이미 철거 되었고‘상사화’도 곧 철거예정.

낡은 가게의 네온사인이 가로등보다 어둡다.

안이 훤히 보이는 미닫이 문.

그 안으로 무대 바닥보다 좀 높게, 넓은 방이 있다.

방 구석구석 장식장, 텔레비전, 업소용 냉장고 등이 적당히 놓여있다.

방의 벽마다 문이 있어,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이 가능하다.

미닫이 문 앞으로는 골목.

보도블록으로 포장 되어 있으나 곳곳 깨져 있다. 가게 앞에는 긴 철제 의자 하나 놓여 있다.

오른쪽으로는 고가도로의 기둥. 그래서 무대가 막혀있다는 느낌 준다.

간판 위로 옥상. 옥상 저 멀리 휘황찬란한 도시의 야경. 그 위로 무심히 걸려 있는 초승달.

객석에는 막걸리, 우동, 어묵, 담배 냄새가 경계 없이 흩어져 있다.

무대, 밝아지면

가게 문 한 쪽에 붙어있는 철거계고장.

드레스를 입고 옥상 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경. 한 손으로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 낡아 빠진 철제 빨래 건조대를 이리 저리 돌리고 있다. 어깨 위 카디건은 자꾸 내려오고, 손은 모자라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미나, 가게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 입에 문 담배. 눈에는 멍 자국.

방에는 텔레비전이 켜 있다.

모경이 빨래 건조대를 돌릴 때 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또렷한 소리 번갈아 들린다.

모경은 케이블이 끊긴 텔레비전의 공중파 전파를 잡기 위해,

텔레비전과 옥상의 빨래 건조대를 철사로 연결하고 있다.

 

모경 대한민국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구. 내 비록 먹고 먹히다가, 다 늙어 여기까지 굴러왔지만서두, 나 떳떳한 여자야. 오줌 누고 털어 낼 시간두 없이 일만 했다구. 근데 이제 와 나가라구? 꼴랑 돈 몇 푼 쥐어 주고? 오해 한번 작살이다, 니들. 산전, 수전, 공중전 그런 건 나 한테 껌이라구 껌, 알어! 내가 무서운 게 있을 것 같니? (미나에게) 야, 이년아. 들어가서 좀 나오나 봐봐! 니 언니 다리 후들거리는 소리 안 들려?

미나 (앉은 채루 고개 빼 옥상에 대고) 그림이다 그림. 예술해요? 지붕 무너져요, 철거반만 좋은 일 할라구?

모경 저, 저, 육시할 년.

미나 (피우던 담배 골목으로 던지며/웃음기 묻어 있게) 그게 무슨 말인 줄이나 알구 씨부려요?

모경 니 같은 년 쪼사 버릴 때 쓰는 말인 건 알그든?

미나 (담배 새로 하나 꺼내 물고/가게 문 앞에 붙여진 계고장을 보며) 맞네. 죽은 년 목에 줄 한 번 더 걸기네. 어디 하늘에서 오랏줄 한 번 내려 줄래요?

모경 철사 줄 내릴까?

미나 그거 가지구 되겠어?

모경 쳐 닫어라, 주둥이.

미나 (모경을 향해) 말뽄새 하구는. 그런다고 텔레비전 나와요? 빨래줄로 테레비 안테나 한다는 말, 언니 들어 봤수?

모경 아니.

미나 뭘 믿구?

모경 넌 들어봤니?

미나 지금.

모경 그럼 됐어.

미나 헛수고. 내일 내가 전파상 가서 안테나 하나 사 올 게. 내려 와요. 오늘 장사 종 칠라우? 개시는 해야지.

모경 개시는 무슨 얼어 죽을. 소주나 한 병 가지구 나와.

미나 점점.

모경 말 안 들려?

미나 큰 언니 오면 무슨 소릴 들을라구?

모경 큰 언니두 오늘 장사 작파할꺼야.

미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몰라요.

모경 지랄 말구 테레비 나오나나 좀 봐봐!

 

모경, 옥상에서 계속 낑낑대고.

미나, 소주 한 병 가지고 마당으로 나온다. 맨발이다.

모경의 모습이 한심스러운지, 안쓰러운지, 손에 든 소주를 따서 몇 모금 마신다.

모경은 여전히 건조대와 싸움 중이다. 이제는 건조대를 거의 분해하는 지경.

 

미나 꺄아, 쓰다. 사람 좀 보여요?

모경 손님들도 기분이라는게 있는데, 맨 철거 계고장에, 불두 어두컴컴하고. 너 같으면 여기까지 끼대 들어와 몸 풀고 싶겠니? 발 안 시려?

미나 싼 맛 있잖아. 그리구 불 끄면 청담동이건, 여기건 다 똑같지 뭘. 오입질 별건가.

모경 그러니까 니가 남자한테 맨날 얻어 맞는거야.

미나 그럼 언닌, 그렇게 잘 알아서.

모경 (말 자르며) 남자 바구니하고, 남편 바구닌 달라. 남자랑은 불 키구 하는 거구, 남편이랑은 불 끄구 하는 거야. 남자라고 하는 것들은, 지가 지 눈으로 확인 안 하면, 못 믿거든. 난 아직두 불 키구 하잖니. 너 불 끄지? 그래서 니가 단골이 없는 거야.

미나 (어이없는 웃음) 언닌 아저씨랑 할 때, 불 끄니?

모경 (혀를 끌끌 차며) 밥을 채려, 입 속에 넣어 줘도, 씹질 못하니. 상상을 하게 둬야지, 상상을.

미나 무슨 공상과학이야?

모경 니도 안 지겹겠니? 아무리 잠자리라지만, 한 사람하고 줄창 붙어 먹는다구 생각해 봐, 질리지 않겠어?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그러니 불 끄고, 요리요리, 하면서, 오늘은 장동건이, 내일은 원빈이, 모레는...

미나 단골 만들랄 땐 언제구. 왜 쿠폰이라두 만들어 찍어 주라구 하지. 열 번 자면, 한 번 무료, 스무 번 자면, 쇼는 공짜.

모경 넌 가만 보면, 너무 꼬였어. 그런 면 없지 않아 있어. 너 그러다 평생 이 바닥에서 늙어 죽는다.

미나 이미 늙구 있는 걸. 안 억울해.

모경 짐 다 쌌니? 근데 이 사람들은 올 생각을 안 하네.

미나 무슨 최후의 만찬을 펼치려구, 도망간 년 까지 잡아와 이러시나 몰라.

모경 도망 아니지. 어쨌든 다시 돌아 오잖어. 그나저나 수정이 스페어라서 사식두 안 넣어 줬을텐데.

미나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스페어가 뭐예요. 떠나는 마당에 여기서 쓰던 말은 여기 놓구 가자구.

모경 고쳐질까?

미나 가만 안 둘거야.

모경 어린 것 앞길에 이런 말 씨부렁거리는 거 참 쓰지만, 그년 팔자두 참, 못 생겼어.

미나 팔자, 팔자. 그말 참, 편리하네.

 

모경, 골목 저 편을 바라보면, 미연과 수정, 오는 것이 보인다.

 

모경 아이고, 큰 언니 오네! 수정이 온다.

 

모경, 호들갑스럽게 내려온다.

미연, 앞서고 수정, 미연과 거리 좀 두고 뒤따라온다.

모경, 수정을 보자마자, 달려가 수정의 손을 꼭 잡는다.

 

모경 아이고, 수정아. 어린 게 얼마나 고생 많았누? 이 손 차가운 것 좀 보게. 얼른 들어가자.

미연 짐 다 쌌어?

모경 짐 뭐 있어요.

미연 별 일 없었지?

모경 있었으면 내가 벌써 언니 찾아 갔겠지. 뭘 그런 걸 물어보우?

 

미연,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미나를 잠깐 보고, 다시 진행해 방 뒤쪽의 문으로 들어간다.

수정, 미연 따라 들어가는데, 미나, 수정의 길을 막아선다.

 

미나 (수정에게) 우리 대화 좀 해야지?

모경 (수정의 눈치 보며) 미나야!

미나 내가 사냥꾼이라두 되는 거니? 그런 거라면 나 억울하잖니. 총두 한 번 제대로 못 쏴 봤는데. 빵!하구.

모경 그만 하자. 들어가 이야기 해. 춥다. (수정에게) 손 시렵지? 손 튼 거 봐라. 살성, 왜 이 모양이야.

미나 (까르르 웃으며) 눈물 없인 못 보겠네. 진짜 딸 아니야? 뒷골목, 애끓는 모정이라니.

 

모경, 미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수정을 미연이 들어간 다른 문으로 들여보낸다.

미나, 담배와 텔레비전을 끄고, 남아 있는 소주를 제 속에 모두 털어 놓은 후에,

조금 비틀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객석을 향해 바른 자세로 앉는다.

 

옷, 갈아입은 미연, 뜨개질 바구니를 들고 방으로 나온다.

 

미나 (수정이 들어간 방에다 대고) 등신. 모자란 년. 돌아보지 말구 갔어야지. 가는 길 몰라두 묻지 말구, 앞으로만 갔어야지. 뒤를 왜 쳐다봐? 머리 놓구 갔어?

모경 지가 갈 데가 어디 있겠어. 지도 막막하겠지. 그만 하자.

미연 장사 어쩔래?

미나 (미연에게) 왜 데리구 왔어요?

모경 (미연의 눈치 보며) 지가 온 거겠지.

미나 알려 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연 쟤두 그 정도는 알구 있어. 그럴 나이는 돼.

 

미나, 희영, 미연의 대화가 진행되는 도중, 수정, 배우들 모르게 등장,

방 뒤편 서랍장에서, 화장품을 꺼내, 조심스럽게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미나, 모경, 미연은 수정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다.

 

미나 언니두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쟤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거.

모경 자자, 장사하자. 돈 한 푼이라두 더 쥐고 있자. (미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얘, 애 다 듣는다. 쉬게 좀 둬.

미나 쉬라구? (벽 두드리며) 베니아 판으로 만든 방에서, 남자들 헐떡거리는 소리, 온전히 들으며 쉬라구? 차라리 나와서 일을 하라구 해요. 오히려 그 편이 머릿속 담백할테니까.

미연 그래, 그럼 그러라구 해.

미나 뭐하러 데리구 왔어요? 나 도는 꼴, 그렇게 보구 싶어요?

미연 너 안 돈다는 거 알어.

미나 내 돈 먹구 날라서, 경찰한테까지 꼰지른 년이라구요.

모경 돌아 왔잖어. 어쨌든 지도 뭔 생각 있으니까 왔겠지.

미나 (미연에게) 좋은 구경하시겠어요. 내가 얼마나 길길이 날 뛸건지, 기대되지 않아요?

모경 니 힘만 빠져. 그거 볼 여유, 언니도 나도 없어. 맛없게 왜 이래. (미연에게) 수정이 괜찮아요?

미나 괜찮아야지. (미연을 보며) 다 알려 주셨다잖어. 또 그 착해 보이는 얼굴로 그랬겠지. 우린 나쁜 사람들 아니야. 우릴 이렇게 만든 세상이 나쁜 거야. 세상을 욕해. 우릴 욕하면 넌 정말 나쁜 애야.

모경 (감정적이지 않게) 다 알구 있어, 다. 근데 지금 여기 있잖어. 우리 다 여기 있잖어. 어쩔 수 없잖어.

미나 그럼, 그러셨겠지. 세상은 나빠두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갈 곳 없는 널 재워주고 입혀 주었잖니.

 

수정이 들고 있던 화장품 하나를 떨어뜨린다.

셋, 뒤 돌아보면,

수정은 자신의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한 화장을 했다.

모경, 놀라 달려가고,

미연은 수정을 한 번 보고, 감정 없는 얼굴로, 미닫이 문 앞의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한다.

 

미나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악!

모경 (수정에게 달려가서 티슈 뽑아 수정의 얼굴 닦으며) 언니들이 잘못했어. 언니들이.

미나 왜 돌아왔어! 왜 돌아왔냐구! 돈, 내 돈 내놔.

수정 (정신이 나간 말투) 수정이는 이쁘다.

 

모경, 수정이가 제 정신인지 수정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모경 (미연에게) 언니, 얘 방금 뭐라구 했수? 이거 수정이 맞어?

수정 수정이는 이쁘다.

미연 놔 둬.

모경 언니는 뭐라구 했수?

미연 어쩔 수 없잖어.

모경 무슨 말이 그러우?

미연 이겨 내야해.

미나 (수정에게 비틀비틀 걸어가) 화장품을 이렇게 덕지덕지 쳐 발랐는데, 왜 너한테서 개밥냄새가 나니? 월월! (미닫이문을 모두 밀어버리며) 이제 개새끼들이, 너한테 몰려올거야, 들이댈거야! 널 물고 빨거라구, 월월! 월월!

수정 (개 흉내를 내며) 멍멍! 멍멍!

모경 저것들이!

 

수정 개 흉내를 내며, 방바닥을 혀로 핥는다.

미나, 냉장고로 다가가 소주를 한 병 꺼내 들이키고.

모경,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온다.

수정에게 뿌리면, 수정 잠시 골몰.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지,

 

수정 젠장, 차가운 것 같아.

모경 정신차려, 이것아!

수정 씨발, 차갑다구.

모경 정신 들어? 괜찮아?

수정 말짱해! 여기 다시 들어오면 정신 놓을 줄 알았는데. 염병할.

모경 (수건으로 물 닦아 주며) 이 골목 사람들 다 합치면 몇 십, 아니 수백명이야. 그 사람들 다 미쳤을까봐?

수정 (미나에게 가 미나의 무릎 잡고. 싹싹 빌며) 언니, 날 밟아. 내가 잘못했어. 잘못하다는 말로는 안 된다는 거 나 잘 아닌데, 난 돌이라 그 말 밖에 안 나와.

미나 돈 내 놔.

수정 (주섬주섬 제 속에 감추어 두었던 돈 꺼내며) 몰라. 무슨 말 하는지두 안 들려. 그래두 무조건 미안해.

미나 (바닥에 흩어지는 돈을 보자, 한 장 한 장 쥐고 입 맞추며 제 안으로 넣으며) 어떻게 번 건데. 말루 표현 못 해. 고생한 거 말루 표현하면, 내 고생 흔해지는 것 같아서 말 안 해.

모경 미친년. 여기가 고생이었던 것 같니?

미나 (헛웃음) 헛 나온 말이지?

모경 언니가 우리 밥을 굶겼니, 감금했니? 팁을 가로챘니?

미나 길들여졌니?

모경 이제 우린 빚두 없어. 넌 자유야? 근데, 왜 또 빚을 얻어? 널 구속하냐구?

미나 상관 마.

 

미나, 돈을 세다가, 부족하다는 듯.

수정의 멱살을 잡고.

 

미나 어쨌어?

모경 손 놓구 말 해!

미나 어디에 썼냐구! 술 먹었니? 약 했니? 남자 샀니?

수정 책 샀어.

미나 뭐? 책?

수정 교과서 샀어. 국어도 사구, 윤리두 샀어. 음악책, 미술책. 필통, 연필두.

 

미나, 수정의 대답에 벙, 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밟았는지,

텔레비전 켜지고,

지지직, 거리는 소리 들린다.

여전히 미연은, 의자에 앉아 뜨개질 중이고.

모경, 천천히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 다시 빨래 건조대를 이리 저리 돌린다.

 

미나 (미연을 가리키며) 저 잘난 언니가 학교라두 보내준다디?

수정 아니.

미나 학교에선 우리 같은 사람, 뭐라구 배우는 지 알어? (수정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쓰레기! 어때, 선생보다 내가 낫지?

수정 돈, 갚을께. 내가 쓴 돈 채워 놓으면 되잖아.

미나 책은 어쨌니? 사물함에라두 넣어 둔 거니?

수정 여기 없어지면, 나 갈 곳 없어.

미나 난 갈 곳 있겠니?

수정 다 학교 가. 내 나이에는.

미나 학교. 학교. 그래, 여기 사람들, 한 번씩은 다 학교 가더라. 콩밥 주는 학교.

수정 나보고 다 학생 아니냐고 물어봐.

미나 술 살 때? 담배 살 때?

수정 버스 탈 때.

미나 거기서 니가 배울 께 뭐가 있을까? 손님 빨리 싸게 만드는 방법 같은 걸 사회적으로, 과학적으로, 음악적으로 나눠서 배운다니? 잘 몰라서 그래. 난 가방 끈이 아주 없잖니.

수정 이러지마, 언니. 내가 빌잖어.

미나 착각하지 마. 너 지금 비는 거 아니야. 니가 정말 빌고 싶으면, 시간 되돌려 놓아야 해. 그럴 수 없으면 난 너 빈다고 생각 안 해. 할 수 없어.

수정 내가 할 수 없는 거잖어.

미나 그러니까 난 너 용서 안 해.

수정 제발.

미나 얼굴에 젤 침 뱉기 쉽단다.

수정 (참고 참다가 폭발해서) 그래, 나 언니 돈 가지구 갔어, 남자새끼들 어린년이라면 환장하니까, 온통 늙은 것들 속에서 나 비쌀 것 같아서 여기 왔어. 근데 여기 다 망했다잖아, 가게 없어진다잖아. 똥 줄 타잖아. 돈 보니까 눈 휙 돌았어. 언니 돈 들구 날랐어. 책 샀어. 책만 있으면 나도 학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구. 근데 나한텐 학교 가는 길이 없던걸. 사거리 지나 횡단보도만 건너면 학교던데, 난 백 번 천 번 그 길 걸어두, 학교에 갈 수 없었어. 그 길 내 꺼 아니니까. 내 꺼 될 수 없으니까. 나보고 뭘 더 어떻게 하라구.

미나 화 내는 거니? 나한테?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그래야 내가 너한테 마음껏 욕 할 수 있지. 저 언니들 표정 봐. 나만 나쁜년이라는 표정이잖니. 이제 좀 게임이 되네.

수정 왜 언니가 내 앞에 있어?

미나 난 니 앞에 있은 적 없어. 그랬다면 니가 내 뒤에 있었겠지.

수정 씨발, 난 결국 언니처럼 되어 버릴 거라구.

미나 알았잖아. 그 정도는.

수정 안 받아들여져. 그 사실. 늘 새로워. 때 되면 배고파지는 것처럼, 한 끼 아무리 두둑하고 맛나게 먹어두 때 되면 배고픈 것처럼, 이해 됐다가두 이해 안돼.

모경 텔레비 나오냐?

미나 날 놓아주면, 앓던 이 빠진 것처럼 시원할 것 같니? 천만! 이 빠진 빈 자리, 그 허한 자리는 뭘루 채우려구?

모경 텔레비전 잘 나오냐구!

수정 반대쪽으로 씹으면 되요!

미나 그렇게 똑똑한 년이 왜 돌아와?

수정 나이든 사람이 그것두 몰라요?

 

미나, 수정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면,

 

모경 잘 나오는가보네. 수정아 텔레비전 봐라. 눈 거기다 두면 되는거야.

 

곧, 어디선가, 양말, 양말 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양말은 경찰 단속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골목 포주들만의 암호이다.

이어 텔레비전 화면이 깨끗해지고, 흥겨운 캐롤이 나온다.

미나, 양말, 소리에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미닫이문을 활짝 연다.

미연, 양말, 양말, 하고 외친다.

 

미나 (수정에게) 춤 춰.

 

수정, 무표정한 얼굴로 캐롤에 맞추어, 벽 잡고 춤을 춘다.

골목길 지나는 손님을 유혹하는 몸짓.

모경도 천천히 옥상에서 내려와 방 안, 미나 옆에 가 앉는다.

 

모경 니미럴.

미나 내가 짭새들한테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모경 밥 줄 끊구, 케이블 끊구, 또 뭐 끊을 게 남았다구 양말이야, 양말은.

 

시후, 날씬한 양복을 입고, 손을 비비며 골목으로 들어온다.

 

미나 오빠! 장동건 닮은 오빠! 동생한테 기회 한 번 주세요! 네! 동생, 싱싱해요, 싱싱해! 활어야 활어!

 

미연, 들어오는 시후를 보고, 양말, 소리를 멈추고,

자리에 앉아 뜨개질 계속한다.

시후, 미연을 보고 이제야 찾았다는 듯, 미연의 옆에 앉는다.

시후가 미연 옆에 앉으면, 미닫이 문, 양 옆에서 커튼 쳐지고, 방 안은 보이지 않는다.

미연과 시후가 대화를 하는 동안, 방 안에서는 텔레비전 소리, 깔깔대며 웃는 소리, 노래 소리, 싸우는 소리, 정사 소리가 섞여 간간히 들린다.

 

미연 저녁은?

시후 잘 못 온 줄 알았어. 이 골목, 이렇게 낡나?

미연 뭐든 안 그런가.

시후 사람 손 안 타니 늙은 거 쉬워.

미연 나도 늙은 것 같아?

시후 안 늙었다면, 다른 남자 손 탔다는 말이구, 그렇다구 늙었다 하긴 내가 미안하구. 참 할 말 없네.

미연 늙은 거 알면서 자꾸 물어보게 되는 건 뭘까 몰라.

시후 짐은?

미연 뭐 있겠어.

시후 추운데 왜 이러구 나와 있어?

미연 길 못 찾을까봐, 그랬다면 믿을까? 어쨌든 여기 많이 변했잖어.

시후 (가게 쪽을 향해) 손님 있어?

미연 한 팀. 애들. 코 묻은 돈이지 뭐.

시후 그래두 아직 의리들은 살아서, 양말, 양말, 신호는 보내주네.

미연 짭새, 용역, 구청. 두루두루 쓰여. 어째 손님들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다녀가, 요즘은.

시후 돈은 좀 만졌어?

미연 재개발이 참 그렇더라. 내가 은행 vip가 되더라구. 어느 날 세금 내러 은행에 갔는데, 글쎄 vip 오셨다구  날 룸으로 데리구, 아니 모시구 가더라구. 가서 커피 타 주고,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시후 이 가게가 너한테는 나보다 낫다, 야.

미연 vip룸에 전기세 내러 가는 게 뭐 그리 좋겠니. 은행장될라구 그 사람두, 공부 여간 하지 않았을텐데, 겨우 나 같은 년 커피나 타주려구 그 공부했다 생각하면 내가 다 억울해.

시후 그걸 뭐 어쩌겠냐.

미연 애들 보내야 해.

시후 몇이나 있어?

미연 셋.

시후 다룰 만 해?

미연 이제 뭐, 다 끝인데.

시후 기분 어때?

미연 별장 나가는 기분이랄까?

시후 두부래두 사 올까?

미연 더 이상할 것 같은데? 학교 나오며 두부 먹어 본 적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시후 근데 두부를 왜 먹어?

미연 낸들 알어. 먹어 본 적 없다니까.

시후 그러구 보니까 참 짧았네. 함께 있었던 시간.

미연 처음 별장 간 게 언제였나? 그래, 큰언니 주방 가 있구, 다른 언니들 룸 들어가 쑈 뛰구, 모경이던가, 미나던가. 이젠 이름두 헛갈려. 암튼 내가 그 언니 돈 가지구 나와 삐끼를 한거야. 단속 걸렸지 뭐. 사실 잡혀가구 싶었거든. 그 돈, 언니가 천호동가면서 미리 받은 돈이었으니까, 신고도 못 하는 돈이었지.

시후 돌아갔잖어, 결국은.

미연 그 때 처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내가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죽을 때 까지, 떠돌아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말야. 그건, 무서움보다는, 지겨움에 가까운 거야.

시후 그런 니가 나한테 왔으니.

미연 여기 처음 오던 날 생각나.

 

시후, 일어나 무대 정면에 서면,

 

미연과 시후의 회상.

수정, 미나, 모경은, 각각 10대의 미연, 20대의 미연, 30대의 미연으로,

미연은 미연의 엄마, 미연의 시어머니로 장면에 따라 분扮한다.

배우들의 등퇴장은, 좌우 통로를 활용, 적당하게 움직인다.

 

미닫이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 열리면,

앳된 모습의 수정이 가방을 들고 있다.

수정, 발걸음은 수줍고, 미소는 순진하고.

미연은, 수정의 엄마와 미연의 1인 2역.

 

미연 깨끗했어. 더 없이.

시후 네 눈, 맑아서 그렇게 보인거야.

미연 거울 뚫어져라 봤지.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그리고는 생각했어. 이 얼굴이 뭐가 좋아, 넌 저럴까?

미연(엄마) 기차 타면, 젤 앞에가 앉어. 서울역 내리면, 누가 가자구 해두 아무도 따라가면 안 되는겨.

수정 그 다음 말, 내가 해 볼까?

미연(엄마) 니 애비도 나온다는 걸, 내가 말렸다. 니년 또, 본숭만숭 할 꺼 아녀. 그래두 니 애비인데.

수정 내 아빠가 아니라 엄마 남편이라구 하자.

미연(엄마)  근데 저 놈 믿을 만 한겨?

수정 딸 팔려가는겨?

미연(엄마) 내가 어째 맘이 안 놓여.

수정 가서 남편 밥 해줘요.

미연(엄마) (사이) 수정아.

수정 괜찮아. 괜찮아.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자, 우리.

미연(엄마)  그래두, 니 아부지 때문에 우리 밥은 안 굶었잖어.

수정 그거 하나 믿구, 나 엄마 두고 가는 거잖어.

미연(엄마) 니가 남편을 믿으면 안 되는겨. 남편이 널 믿게 해야 되는겨.

수정 나두 알아요. 그건.

미연(엄마)  편지 해야해. 꿈자리만 뒤숭숭해두 나 너 있는 쪽 못 봐.

 

곧, 미나가 나와 수정의 가방을 받아 든다.

미닫이 문 안으로 빗소리.

분홍색, 노란색으로 된, 좀 촌스러운 한복을 입고 있는 미나. 양산을 우산으로 쓰고,

수정이 표정처럼 수줍다.

 

미연 선녀보살, 제일부동산, 미아슈퍼. 아직두 간판을 외워. 종점 내려, 골목을 돌고 또 돌아 들어가면 만나던 여인숙. 네온사인보다 가로등이 더 밝던 그 여인숙. (사이) 정작 그 여인숙 이름은 기억 안 나네. 당신, 기억나?

시후 니 귀에다 대고 말했었다. 내리던 눈도 내 말, 못 듣게 하구 싶었거든.

미연 나랑 자구 싶다고?

시후 그 땐, 그 말, 왜 그렇게 부끄럽든지.

미연 내가 이런 여자인 줄 알았어도?

 

미연은 미나의 시어머니와 미연의 1인 2역.

 

미연(시어머니) 발 좀 보자.

 

미나, 수줍은 듯 버선발을 벗어, 미연에게 내밀고.

 

미연(시어머니) 이마를 좀 보자.

 

미나, 부끄러운 듯,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보이고.

 

미연(시어머니) 발볼이 넓은 걸 보니, 남편 일찍 잡아먹겠고, 이마가 툭 튀어 나왔으니, 남편 앞길 가로막겠구나.

시후 상관없어.

미연 불 좀 꺼 줘.

 

조명, 좀 더 어두워지고,

 

미연 불을 켰으면 절대 눕고 싶지 않았을 거야.

시후 그게 무슨 냄새였더라.

미연 정액 냄새, 땀 냄새, 오줌, 땀, 눈물, 구토 냄새.

시후 그리고 우리.

 

모경, 수정을 데리고 등장한다.

수정, 한 손으로는 모경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막대 사탕을 꼭 쥐고.

모경, 미나의 가방을 받아 들고.

미나, 퇴장하면.

 

미연 나도 엄마가 되었다구.

시후 날 닮은 아이였어.

미연 날 닮은 아이이기도 했구.

시후 그 때, 그 아이가 살았다면 지금 내 키만큼 자랐겠지?

미연 날 알아볼까?

시후 그럼. 제 얼굴을 한 번이라도, 거울 통해 봤으면.

미연 살릴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유괴했던 아이 부모가 내게 돈을 주었고, 그래서 그 돈으로 아이가 수술을 했다면?

 

모경, 겁에 질린 표정. 수정, 사탕을 빠는 데 정신 나가 있다.

 

모경 괜찮아. 이것봐, 울지두 않구 오히려 날 걱정한다는 표정이잖어. 잘 사는 집 아이야. 분명해. 오천만 받자. 아니, 빌려달라구 하자. 값는다구. 꼭 값겠다구. 같이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이거 이해 못 하겠니?

시후 끝났어.

모경 무슨 소리야? 3개월이나 남았다구 했어. 시작하자. 할 수 있어.

시후 숨 안 쉰대.

모경 (시후의 말이 무슨 말인 줄 알지만/인정 할 수 없다는 표정과 말투) 나도 지금 숨 못 쉬고 있어.

시후 그만하자.

모경 뭘?

시후 다 그만.

모경 뭘? 아니, 그럴 수 없어. 꿈이야. 꿈 아니면 거짓말이야.

시후 꿈이라면, 깰 수 없는 꿈이구, 거짓말이라면, 너한테만 거짓말이야.

 

모경, 가방을 툭 떨어트리고, 수정의 손을 놓는다.

수정, 모경을 빤히 보다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커튼, 닫히고.

 

시후 불행했겠지, 지금만큼.

미연 그 때도 그런 생각 들었어.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끝이겠구나. 영원히, 떠돌아다니겠구나. 그런데 이번엔 멈출 수 없었어. 한 발 앞에 내 아이가 있었거든.

시후 어쩔 수 없었다구 생각하자.

미연 그 때 알았어. 난 이제 행복할 수 없겠구나. 눈 감는 날 까지 그 일, 절대 잊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불행하게 살기루 했어. 철저하게. 그래서 여기까지 왔구.

시후 지난 일이야. 잊어.

미연 말이란 거 참 간편해. 잊으면 되니까.

시후 네 갈길, 걱정해.

미연 잊고 싶지 않어. 그것들 잊으면 날 잊는 거니까. 아무것도 남는 것 없어지니까.

시후 그래두 잊어.

미연 당신이 당신 몫이 있는 것처럼 나두 내 몫 있는 거야. 잊는 건 당신 몫이야.

시후 짐 될 꺼야. 당신, 자신보다두.

미연 나 자신 보다두?

시후 훨씬.

미연 (무대 앞으로 천천히 나가) 기회 한 번 주세요, 개도 안 물어갈 팔자지만, 나한테 기회 한 번 주세요.

시후 두고 가.

미연 술에 취해, 남자들에게 밟힐 때 마다, 생각했어. 나, 죽어 지옥에 온 게 아닐까?

시후 그렇다면 다행이네. 지옥갈 일 없잖아.

미연 나 살아 있더라.

시후 여기, 두고 가.

미연 아니, 살고 있더라.

 

시후 무대 밖으로 나간다.

미연, 다시 의자에 가 앉고,

이제 거의 다 짠, 양말을 들어 이리 저리 보고 있다.

가게 커튼 열리면,

좀 헝클어진 차림의 모경과 미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휴지로 이곳저곳 닦기도 하고.

 

미나 내가 한 손으로 장갑을 씌웠더니, 어찌나 놀래든지. 고 녀석, 그 표정이 얼마나 맛있든지.

모경 젊은 게 좋냐?

미나 그래두 그것들은 사람같거든.

모경 수정아! 수정아!

 

뒤쪽  방 문 열리면,

화장도 옷도 심하게 엉망이 된 수정,

손에 돈 몇 만원 들고 나온다.

미나에게 그 돈 내밀면,

 

수정 다 갚았어.

미나 (수정 한 참 보다가/그 돈 받아 넣고) 억울해?

수정 아니.

미나 (수정 얼굴 잠시 보고) 앉어.

 

미나, 수정 얼굴의 화장을 하나하나 꼼꼼히 지워준다.

그리고, 자신의 화장품으로 화장을 해 준다.

 

미나 화장품, 싼 거 쓰지 마. 비싼 거 쓰라구.

수정 남의 사.

미나 내 피부 보면 느끼는 거 없니? 돈 한 푼 아낄라구, 싼 거, 버린 거 이런 거 주워 쓰다가 피부 이 모양이잖어.

모경 눈썹, 너무 진한 거 아니야?

미나 그래야 이마 좁아 보여. 이마 툭, 튀어 나오면 남편 출세 못 시켜.

 

미연, 다 만들어진 양말을 내려놓고,

일어나 모경, 미나, 수정을 본다.

 

미연 왜 아직두 그 옷이야.

모경 우리 송별회두 안 해요?

미나 웃긴다, 언니. 무슨 좋은 이별이라구.

모경 그르니까 더더욱 해야지. 다신 우리 이런데서 만나지 말자구.

미연 수정아, 가서 소주 남은 거 다 꺼내 와.

모경 오늘이 오긴 오네.

미나 오늘은 언제나 와요. 내일이 안 와서 그렇지. (술 마시려는 수정에게) 니가 왜 술이야? 주소 잘못 찾았어. 넌 사이다 마셔.

모경 그르게.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네.

미나 언니는, 언니가 생각한 내일이 온 적 있수?

모경 아니. 넌?

미나 당연히 나두 아니지. 내일이 오늘 오면, 그건 내일이 아니잖수.

모경 (잠깐 골몰) 뭐가 그렇게 복잡해?

미나 술이나 마셔요. (미연에게) 언닌, 어디루 가우?

미연 글쎄.

미나 하긴, 언니가 갈 데 없겠어요. 언니도 좀 편하게 살아요.

미연 너는?

미나 이년은 지은 죄가 좀 많아야지요. 삼천 배를 삼천 번 해도 용서 될까 몰라. 이런 년 갈 데 뻔하지 않수.

수정 그거 하면 되요?

모경 뜬금없긴. 뭘?

수정 삼천배.

미나 그거 한다구 용서되면, 죄 짓고 후회하는 사람 하나두 없겠다.

수정 (사이) 난 신문배달을 할 거에요.

미나 왜 하는 김에 우유배달두 하지?

모경 아침 열 시 이전에 깨울라 치면, 쌍욕부터 하는 니가? 다 컸다, 우리 수정이.

수정 신문배달하면, 우리 하루 끝났잖아요. 것보다 재미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는 거.

미나 동종업계 종사자로써 이럴 땐 기특하다고 해야 하는 거니?

수정 아무도 나한테 그걸 가르쳐 준 사람 없었어.

미연 (사이) 니가 있잖어. 널 가르쳐 준 사람, 바로 너 말야.

수정 에이, 재미없다.

모경 우리 수정이, 잘 크네. 그래,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미나 (모경에게) 언닌 그 사람 믿어?

모경 내가 나도 못 믿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믿니.

미나 마찬가지.

미연 공평하네. 갈 때 택시타구 가. 궁상떨지 말구.

모경 돈 어딨다구.

미나 서울 와 택시 한 번두 안 타봤지?

모경 탈 일 뭐 있니.

미나 그래두 명색이 시집가는 건데.

모경 시집? 맞네. 이 이모경이도 시집가지. 어째, 언니한테서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시집가는 것 같다.

미나 그렇게 좋아요?

모경 (수정에게) 겨울엔 꼭 핸드크림 바르구 다녀. 여자가 손이 고와야지. 가난은 속여두, 여자 손은 못 속여.

미연 마지막 날이야.

미나 진짜 마지막일까?

미연 다시 만나진 않을 테니까.

미나 그래, 우리는 안 만나겠지. 하지만, 이름만, 얼굴만 다른 언니들을, 언니 같은 사람들을, 난 죽을 때 까지 볼 것 같네. 어쩌지?

 

골목, 어디선가 들려오는 양말, 양말 소리.

 

미연 갈 시간이네.

 

미연, 바구니 속에서 봉투 몇 개를 꺼낸다.

봉투 안에, 미연이 짠 양말을 하나하나씩 넣는다.

골목으로 무리 지은 남자, 몇 지나간다.

 

E 고가도로의 시끄러운 차 소리.

수정, 미나, 모경은 미연이 준 봉투를 하나씩 받아가지고 퇴장.

저희들끼리 손을 흔들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하고.

수정은 왼쪽으로, 미나는 오른쪽으로, 모경은 객석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퇴장.

 

무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 차 소리도, 사라지고.

 

미연, 방에서 깨끗한 옷 입고,

장부 하나 가지고 나온다.

바닥에 놓고, 한 장, 한 장 찢어 태운다.

 

미연,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을 흥얼거린다. 가사, 뭉개서 들리는 정도.

 

시후, 사자의 복장을 하고, 입장한다.

너무 무겁지 않은 복장으로.

 

시후 가자.

미연 (담담하게) 누구세요?

시후 힘들었지?

미연 참 훤 하시네. 근데 어쩌지요. 우리 가게두 문 닫았는데.

시후 내 기억두 내려 놓은거구?

미연 이 동네 말구 다른 곳 가 봐요. 미안해요.

시후 (사이) 안 놓구 가는 것 없지?

미연 서운하긴요.

시후 (미연의 손 잡으며)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양말, 양말, 소리.

 

미연 잠깐만요.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철제 의자에 놓고) 그래두 양말 한 짝 잘 얻어 신었네요. 누가 와 신겠죠.

시후 갑시다.

 

미연과 시후, 퇴장하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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