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권력에 대한 경계를 통해 권력의 욕망으로 부터 벗어난 새로운 불교적 시각을 제시

'권력과 지식, 미셀푸코와의 대담'
지은이:콜린 고든
옮김이:홍성민
펴낸곳:나남출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 그 책은 우리에게 또 다른 책을 읽도록 명령한다. 애시당초 먼저 읽은 책과 뒤에 읽어야 할 책 사이에 공통부분이 있고, 통로가 뚫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가 내게 읽으라고 말한 것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였다.

원효스님이나 헤스터 프린이 공히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기 위하여 저항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는 푸코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던 푸코 말이다.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 푸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를(불살생의 의미인 아힘사/ahimsa를 탈권력의 의미로 확대해석 하는 것이나, 말도 안 되는 듯한 ‘홀로결사’라는 말을 만들어서 주장하는 것이나 다 푸코의 영향이다.)그러면서도 사실은 푸코를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음도 말이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은 척 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먼지와 벗하고 있는 외로운 책들 속에서 나는 ‘권력과 지식, 미셀 푸코와의 대담’(콜린 고든, 홍성민 옮김, 나남출판, 1997)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책 역시 오래 전에 읽은 흔적이 있다.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권력은 행사되는 영향력이라고 개념화해야 합니다. 사회 속에 퍼져있는 세력관계라는 것입니다.”(122쪽)

푸코가 서있는 입각지(立脚地)이다. 인간은 누구나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있음을 말한 니체(F.W.Nietzsche, 1844~1900)를 이어받아서, 푸코는 권력은 어디에나 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웅변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권력이란 국가기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기구 바깥에 존재하는 보다 섬세한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이 변화하지 않는 한 어떠한 혁명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회를 지탱해 가는 권력의 성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89~90쪽)

이러한 푸코를 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영화감독 김기영(金綺泳, 1922~1998)은 ‘파계’에서 붓다가 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 권력에의 욕망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졸저,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 정우서적, 110~117쪽. 참조) 그러나, 정작 불교는 권력욕에 대한 경계를 그다지 말하지 않는다! 가장 끈질긴 다섯가지 욕망을 말할 때에도 권력욕은 거명하지 않는다. 겨우 명예욕만 말한다. 바르트(R.Barthes, 1915~1980)가 말한 것처럼, “명예란 일반적으로 권력의 찌꺼기일 뿐이다.”(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18쪽)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권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그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푸코를 데리고 와서 불교 안에서 다시 권력을 경계/경고하는 목소리를 만들어 내면 된다. 그렇게 불교를 완성시켜 가면 되지 않겠는가.

마침 붓다는 말로써 경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 자체가 권력의 해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임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의 출가(出家)’라는 사건이 지니는 포스트모던적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이제 나는 하고 싶고, 그것이 언제 시간 내서 본격적으로 푸코공부를 해보고 싶은 참된 이유이다.

권력의 포기, 내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무력(無力)해 지지 않는다면 참된 학문도 참된 수행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권력의 욕망에서 헤어나 무력해 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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