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인생에 기회는 세 번 온다고 했다. 나는 그 중 한 번의 기회를 영국에서 잡은 것 같다. 독일에서 한 10주간의 자원봉사가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었고 운도 좋았다. 사람을 얻었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3월의 어느 펍(Pub) 투어에서 염소수염을 가진 키 큰 백인 아저씨를 만났다. 이름은 노버트(Norbert), 30대 후반의 사회복지사 직업을 가진 독일인이었다. 이미 완벽해보이던 영어실력이었는데, 한 달 일정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일정의 반이 지난 터였다.

평소 국제자원봉사를 하고 싶던 나는 여러 단체들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사회복지사’라는 그의 직업을 들었을 때 무척 반가웠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데, 아저씨 일하는 데에서는 국제자원봉사자를 선발하나요?” 내가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가을이면 일손이 모자라서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상사에게 물어볼게”라며 긍정적이었다.

이렇게 첫 걸음을 뗐다. 노버트가 독일로 돌아간 뒤라, 모든 업무가 이메일로 진행되었다. 독일 남부의 하이덴하임(Heidenheim) 시의 공식 초청장을 받았다. 하이덴하임 시는 나를 통한 도시 홍보효과를 기대했다. 나는 그 곳에서 일하며 문화를 체험하고 싶었다. 보수와 숙소는 제공되지 않았다. 다행히 노버트 친구의 가족 집에서 홈스테이를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장문의 편지와 기관을 입증하는 각종 신문기사를 한국으로 부쳤다. 성공적이었다. 9월 5일,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홈스테이 가족들은 나를 따뜻이 맞아줬다. 선하고 인자한 리차드 아저씨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 3개월간 독일 생활이 전혀 외롭지 않았던 건 이들 덕분이었다. 함께 집안일을 했고 산책을 했다. 주말이면 여행도 갔다. 그들의 일상에 동화되면서, 자연스레 문화를 체험했다.

일터에는 조금 다른 모습의 독일이 있었다. 내 공식 직책은 사회복지사 인턴이었고,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쉼터에서 일했다. 이곳에는 주로 동유럽과 구소련 연방에서 이민 온 아이들이 왔다. 이민자들은 독일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차별당하고 있었다.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 쉼터에는 독일아이가 없었다. 그 또한 독일의 현실이었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약간 하게 되자 거리를 두던 아이들도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척 기쁘고 감사했다. 그러나 세 달은 금방 지나갔다. 아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을 때라 아쉬움이 컸다. 친 가족 같던 홈스테이 가족과 헤어지는 것 또한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하이덴하임에서 몇 개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왔다. 홈스테이 가족과 노버트,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내 사진과 작은 기사가 실린 하이덴하임 신문도 함께 들어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끔 해 준 친구 ‘노버트’에게 언젠가 “어떻게 이 고마움을 보답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나도 예전에 한 호주인 부부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며 “너도 나중에 다른 누군가를 도우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 이제 내가 베풀 차례다.

최민희 (사과대 신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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