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교수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 중에 학생들과 함께 ‘금강경’을 읽고 있다. 늘 읽고 들으며, 수없이 말해지는 경전이 ‘금강경’이다. 하지만, 새로 깊이 들여다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우쳐 지는 것이 적지 않다.

이른바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대한 부분 역시 그렇다. ‘금강경’의 주제는 모든 중생들을 다 열반에 이르게 하라는 것인데, 그 중생들을 아홉 부류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류중생이라 한다. 한문 번역본과 범본을 함께 읽으면서 번역본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적지 않게 파악하게 되었다. 구류중생에 대한 부분을 거칠지만 범본에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수보리여, 많은 중생들은 중생의 세계에서 중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에 의해서 거두어 들여진다. 혹은 알로 태어나는 것들이며, 혹은 태로 태어나는 것들이고, 혹은 습기로 태어나는 것들이며, 혹은 스스로 변화한 것들이고, 혹은 형색을 가진 것들이며, 혹은 형색을 갖지 않은 것들이고, 혹은 의식을 갖고 있는 것들이고, 혹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며, 혹은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들이며, 내지 어떠한 가상(假想)된 중생의 세계가 더 가상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세계의 중생들은 다 거두어 들여지게 된다.)”

사실 범본에 비추어 본 결과 한문 번역본에서는 범본의 “내지 어떠한 가상된 중생의 세계가 더 가상된다고 하더라도”에 해당하는 부분이 번역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번역본에서는 구류중생이라 해서 아홉 부류의 중생들만을 헤아렸지만, 실제로는 아홉 부류의 존재들(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까지도 불교에서는 생명체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더 넓게 고려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구류중생은 물론, 우리가 생각으로 가상할 수 있는 세계나 그 세계의 생명들까지도 다 중생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생이 곧 인간으로 치환될 수 없다는 점은 불교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왜 스님들이 대운하가 예정되어 있는 강을 걸으시면서 생태계의 훼손가능성을 짐작하면서 반대성명을 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님들이 아니라면, 불교가 아니라면 인간이 아닌 생명들과 생명도 아닌 존재들을 누가 대변하겠는가. 누가 저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대신 말해줄 것인가.

김 호 성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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