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역사를 찾아서

1. 현재 재정비된 공원의 모습. 수표교와 장충단 자리에 들어서 있는 신라호텔
2. 1919년 조성된 장충단공원과 소실되기 전 제단의 모습
3. 순종의 친필이 새겨진 장충단비
4. 장충단공원 내 이준열사 동상
5. 공원 내 녹음이 우거진 쉼터
1970년 고아로 자란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과 이별을 그린 액션멜로물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조용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지만 처음과 끝에 흘러나온 이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만은 남겨놓고 갔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달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배호 ‘안개낀 장충단공원’

매해 이맘때쯤에는 장충단공원에서 배호가요제가 열린다. 올해도 오는 23일 2시 제 12회 배호가요제가 예정되어 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노랫가락으로 남아있는 장충단공원, 지금은 우리의 옆에서 조용히 함께하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있는 장충단공원이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탄하지는 않았다.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게로 한걸음 다가가 보자.

사실, 장충단공원은 맨 처음부터 공원으로 조성 된 곳이 아니었다. 장충단이란 한자로 표기하면 ‘奬忠壇’이다. 그 뜻대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장려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던 것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 당했던 을미사변 당시, 많은 장병들이 일본자객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맞았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여러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00년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초혼단을 만든 것이 바로 장충단이다.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목숨을 잃은 문신들도 추가되어 장충단에서 제사를 모셨다. 봄과 가을 제사를 올렸으며 그 때마다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았다.

아픈 과거를 달랬던 장충단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
이는 ‘한양가’의 한 구절이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그들의 극심한 횡포에 따라 장충단에 대한 경외감도 높아져갔고 그 모습이 노래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을 기리는 장충단 비는 순종이 태자였던 시절 쓴 장충단이라는 세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으며 뒷면의 찬양문은 을사조약에 통분하여 자결한 민영환이 썼다. 선열들을 기리는 장충단은 1908년부터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를 들며 일제가 금기 시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1910년 우리나라가 강제 합병되면서 장충단도 폐쇄됐다. 또한 일제는 1919년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라는 절과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육탄삼용사의 동상을 세워 공원을 조성한다.

광복 후, 박문사의 건물들은 모두 철거 됐지만 우리의 정신이 깃든 장충단은 계속해서 공원으로만 남게 됐다. 장충단의 건물들은 6.25전쟁으로 모두 소실됐고 장충단비만 남아 1969년 현재 장소로 옮겨오게 된다.

근·현대사의 집결지

이후 조용할 것만 같던 장충단공원에서는 근현대사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1970년대까지 장충단은 시국강연회의 단골장소였다. 1957년 민주당이 주최한 시국강연회에서 김두한과 이정재의 패싸움이 일어났고, 71년에는 신민당 대선후보였던 김대중이 100만 군중을 이끌고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63년 현재는 우리학교 혜화관인 중앙공무원 교육원이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국립극장, 신라호텔까지 들어서면서 그 면적이 적지 않게 줄게 된다.

1980년대에는 특히나 장충단공원이 군사독재에 맞선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시위장소가 됐다고 한다. 현재 남산관리사업소 장충분소에 근무하는 박화춘씨는 “그때는 이렇게 나무가 별로 없어 모이기 좋았지”라며 그 당시를 떠올렸다. 또한 “데모가 너무 많아서 지금처럼 공원도 조성하고 나무도 많이 심은 것”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현재 장충단 공원은 잘 정돈된 도심 속의 쉼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풍파를 거쳤어도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한다. 지금의 장충단공원을 둘러보면 한차례 역사공부가 가능하다. 수표교와 여러 열사들의 동상과 비문이 역사공부를 위한 도우미다.

역사를 되돌아 보는 공간

수표교는 원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다리다. 세종23년에 장마 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을 세운 후부터 수표교라고 불려왔다.

이 수표교가 장충단으로 온 이유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문. 먼저 신영동으로 옮겨갔다가 1965년 지금 이 자리로 정착했다. 수표를 세종대왕기념관에 떼어놓고 온 이 다리는 수표 없는 수표교가 됐다. 하지만 오랜 시간 닳아온 석재의 아름다움이 품위를 잃지 않고 장충단공원의 여유 넘치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장충단공원에는 3·1운동 기념비, 한국 유림 독립운동파리장서비, 이한응 선생비, 유관순, 이준열사 동상 등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약간만 시선을 돌리면 장충단 공원에서 선조들의 항일정신을 느끼고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장충단공원은 작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그득히 차 있다. 가까이에서 쉽게 이러한 역사의 숨결을  집결해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좋은 경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그것은 아픈 역사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모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리에 있지 못하는 수표교와 현대식 건물들에게 잠식당한 공원부지,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많은 선열들의 동상들의 무작위적인 모음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제단도 역할도 잃어버려 이름과 비석만 남은 장충단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오늘은, 우리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내려가 보자. 우리 곁에서 생생히 남아있는 역사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귀기울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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