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기 원형 발굴과 그 의미

1. 한철호(역사교육) 교수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기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대내외적으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국기·국가·국화 등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국기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태극기 원형 둘러싼 논쟁에 ‘물꼬’

 일반적으로 태극기로 불리는 국기에는 파란만장하게 전개된 우리 근현대사의 영욕과 애환이 가장 잘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는 1882년 9월 25일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1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기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원형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최초의 국기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져 왔으며, 우리 마음속 한구석엔 그 원형도 알지 못한다는 일종의 자괴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필자가 최초의 국기 원형을 발굴·공개한 것은 단순히 태극기에 대한 기존의 모든 오류와 학설을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적 자존심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의 ‘태극기’

2.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필자는 박영효 태극기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한승훈(고려대 박사과정)군으로부터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에 태극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곳에 소장된 FO 228/871의 문서 속에는 총천연색으로 그려진 태극기와 그에 관련된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들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이 이 태극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로 제정된 박영효 태극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첫째, 이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의 작성일이 1882년 11월 1일자로 적혀 있다. 이 날은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과 일치한다. 박영효의 ‘사화기략’에 의하면, 9월 20일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한 그는 배위에서 선장 제임스와 의논한 끝에 국기를 제정했고, 9월 25일 고베의 숙소에 이를 처음 내걸은 뒤 10월 3일 국기 제정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이어 그는 10월 13일부터 12월 27일까지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다른 나라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걸고 공식행사를 치루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본 외무성이 입수해서 그린 태극기는 박영효가 제작했던 국기임에 틀림없다.

 둘째,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에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외무대보(차관)가 “며칠 전 귀하[해리 파크스]가 구두로 요청한 바에 따라 조선의 국기로 통칭되는 깃발의 사본(a copy of a flag said to be the National Flag of Korea)을 동봉”한다고 쓰여 있다. 이 태극기가 바로 조선의 국기, 즉 박영효가 만든 최초의 국기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기록과 일치한다. 박영효는 9월 25일에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 …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ㆍ곤ㆍ감ㆍ이의 4괘를 그렸다”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를 발굴·고증한 필자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관계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독립기념관이 태극기와 그에 관련된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필자는 기념관과 공동발굴의 형태를 취하기로 합의하고, 2008년 1월 27일부터 2월 1일까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를 직접 방문하여 최초의 국기 소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 원형과 관련 문서를 복사해서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국기의 형태와 그 의의

3. 박영효가 최초의 국기를 제정하며 참고했던 이응준 깃발

 최초의 국기 형태는 첫째, 현재의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바탕은 흰색이며 건·곤·이·감 4괘의 위치도 같지만, 괘의 색은 검정색이 아닌 청색이다. 둘째, 태극은 현행의 태극기와 같이 청·적색으로 되어 있지만, 그 모양은 현재의 것보다 굴곡이 심하다. 셋째, 이번 발굴된 태극기에서 처음 밝혀진 점은 태극기의 크기이다. 

 최초의 태극기는 가로 4척 7촌, 세로 3척 8촌, 깃대 1촌 2푼이며, 태극의 지름은 2척 7촌이다. 1척을 30.3㎝로 계산하면, 가로 142.41㎝, 세로 115.14㎝, 태극의 지름 81.81㎝이다. 이 크기는 박영효가 제작한 태극기 대·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넷째, 깃봉은 현재와 달리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달도록 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지금까지 국기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던 ‘통상장정성안휘편’(1886년 간행) 소재의 국기와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여기에는 ‘대청국속(大淸國屬) 고려국기(高麗國旗)’라는 이름 아래 태극기를 게재하였고, 1883년 3월 6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국기 제정을 반포한 지 불과 12일 뒤인 3월 18일자로 수령한 조선국왕 자문에 “국기 한 장을 첨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나라 국기를 ‘대청국속 고려국기’라고 명명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청국이 우리나라를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고 이를 대내외에 역설하려는 의도로 우리 국기의 바탕을 황색으로 표시하고 태극 양의에 흰 동그라미를 그려 넣음으로써 국기 자체를 왜곡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형태나 4괘의 모양이 일치하는 점으로 볼 때, ‘대청국속 고려국기’는 이번 발굴된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 원형임을 입증해주는 근거가 된다.

창안자는 이응준, 제작자는 박영효

 또한 최초의 국기는 1882년 7월 미국 해군부 항해국에서 간행된 ‘해상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와 비교하면, 4괘의 위치와 색깔이 다를 뿐 태극의 모양도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이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 당시 이응준이 그려서 성조기와 함께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공식적으로 국기가 제정되기 전 임시로 국기 대신 사용된 것이므로 최초의 국기는 아니다. 이 점은 태극기 아래 국기(National Plag)가 아니라 일반적인 ‘깃발(Ensign)’로 적혀 있는 사실로도 명백하다. 하지만 박영효가 최초의 국기를 제정할 때 이를 참고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금까지는 박영효가 영국인 선장 제임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태극 8괘를 태극 4괘로 바꿔 국기를 제정했다고 알려져 왔다. 한마디로, 박영효는 중국의 속국임을 명시하려 했던 마젠충(馬建忠)의 ‘태극 8괘안’ 요구를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제임스의 의견을 핑계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이응준이 만든 태극기를 모본으로 삼은 셈이 된다. 따라서 최초의 태극기 창안자는 이응준, 제작자는 박영효로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처럼 최초의 국기에는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는 정신이 강하게 깃들어져 있는 것이다. 

한철호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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