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겪었던 지독한 나의 성장통. 스무 살이 되어 다시 찾아왔다.

 지독한 스무 살의 성장통은 무릎관절에서 느껴질 만큼의 아픔이 ‘내가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사소한 물음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청소년기에 떼고 왔어야 할 유치찬란한 물음들이 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한 고통을 풀기 위해 으레 술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적 성장 호르몬이라고 굳게 믿던 술을 과다복용 해보아도 나의 성장통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나를 얽매여 오는 극한의 성장통.

 내가 찾아 온 동대신문사는 일종의 성장 클리닉이었다. 유년시절 유난히도 키가 작았던 나는 고도제한에 묶여 있을 때도 찾지 않았던 성장 클리닉을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찾게 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그 곳. 각종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지금 치료 중이다.

 신문사에 들어와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강연회, 특강에서도 내 자리는 무조건 맨 앞이다. 물론 키순서는 아니다!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당당히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더 기자답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항상 신문사 생활이 항상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환자인 내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의 ‘몰입 치료’를 받기도 한다. 취재를 위해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캠퍼스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기본이요, 그야말로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마라톤 회의’에서 지치지 않는 체력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마감시간까지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작문의 고뇌는 신문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나도 역시 비슷한 성장몽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 훔치고 도망가는 모습이다. 그만두고 싶지만 꿈속에 ‘나’는 같은 행동만 반복한다. 원고마감이 다가올 때의 촉박함이 꿈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가끔은 살려달라는 외마디 비명으로 잠에서 깨어나지만 훌쩍 커있을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 흐뭇하다.

 이제 수습기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병실에 당당히 섰다.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던 스무 살 성장통도 반환점을 돌아섰다. 치료의 중간 쯤 온 듯하다. 비록 스무 살 때 나를 괴롭히던 의문을 모두 풀지는 못했지만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큰 키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대신문사에서의 치료가 끝나는 날, 훌쩍 커진 마음으로 세상을 내려다 볼 것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