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 위에서

비계 위에서


안성훈
 


직업소개소 직원은 내게 단단히 일렀다. 현장에 가서 일하게 되면 절대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거였다. 대학생은 잠깐 일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서 거칠게 대하고 잡일이나 시킬 거라고 했다. 나와 함께 출발한 철규라는 남자는 걱정 말라면서 큰소리 쳤다. 부산에서 회사를 다니던 그는 여자 친구와 싸우고 홧김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일하게 될 줄 알고 기대에 차 있었는데, 소개소에서 우리를 지방 공사현장으로 보내는 바람에 얼마간 힘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기차역에서 나오니 오후 네 시였다.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우리는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철규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어제, 여기 첨 가봤다 아이가. 니는 여기 가봤나?”
“거기가 어딘데요?”
철규는 혼자서 에버랜드에 갔다고 했다. 나는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기가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니 와 이리 경직됐노? 이런데 첨 와가꼬 긴장했나? 사내 자슥이 되가지고 벌벌 떨기나 하고…. 마, 어딜 가든 정신만 똑바로 차리믄 된데이.”
둘이서 소주 반병을 나눠 마신 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소장이 들어왔다. 작고 다부진 몸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소장은 철규와 대조를 이루었다. 철규는 벌떡 일어섰다.
“저… 소장님 되십니꺼?”
소장은 큰 눈을 부라려 우리를 훑어보았다. 앞으로 사용할 장비가 쓸 만한 것인지 아닌지 꼼꼼히 살피는 모양이었다.
“이철규, 강진수. 맞지?”
“예.”
“웃통 까봐.”
철규는 긁적이며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소장을 한 번 쳐다봤다. 소장은 금방이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덩달아 철규 옆에 서서 상의를 벗었다. 두 육체가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둘 다 이래가지고 힘든 일 하겠어?”
소장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었다. 소장은 몇몇 서류를 주며 서명하라고 했다. 철규와 나는 소장의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이번 소장은 무뚝뚝한 엄격주의자 같았다. 차 안에서 그는 신발사이즈와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장이 좀 친절한 성격이라면 며칠 만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길어질 모양이었다. 나는 공사현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단순히 돈을 벌 목적만은 아니었다. 돈을 벌 생각이라면 한 군데서 오래 일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일당도 올라가고 숙소에 적응해서 편하기 때문이다.
숙소에 첫 발을 들여놓자마자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직감이 다시 나를 관통했다. 많아야 한 방에 네 명 이상 쓰지 않던 지난번 현장보다 훨씬 질이 낮은 숙소였다. 상가로 쓰던 건물을 판넬로 가운데를 막아 두 공간으로 나눈 형태였다. 한쪽에는 젊은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햐, 어디서 말린 북어 두 마리 주워 왔구나.”
유난히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새까만 남자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짐가방을 싱크대 옆에 두고 승냥이들의 소굴 같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커튼을 쳐놓아서 어두컴컴했다. 우릴 부른 남자 외에도 두 명의 사내가 속옷 바람으로 누워 담배를 피우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앉아라.”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누런 뻐드렁니가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철규가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늬들 어디서 왔냐?”
“지는 부산에서 왔고예, 야는 서울에서 왔답니더.”
“너는 벙어리여? 왜 말을 못혀?”
철규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뻐드렁니는 나를 초짜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킬킬 웃으며 뭉그러진 발톱 끝으로 내 무릎을 쿡쿡 찔렀다.
“왜? 무섭나? 늬들이 열심히만 하면 아저씨들이 잘 키워줄라니까.”
그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두 사내들에게 우리를 소개시켰다.
“얌마, 두부야. 신참들 들어왔는데 그렇게 티브이만 보고 있기냐?”
두부라 불린 사내는 얼굴 곳곳에 흉터가 나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뻐드렁니보다는 덩치가 있고 튼튼해보였다. 이 남자는 아닐 것 같았다.
“딱 보니까 며칠 일하다 튈 녀석들이구만. 너희 현장 경험은 있냐?”
“없심니더.”
“저도 처음입니다.”
나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한 숙소에서 한 달 이상 있었던 적은 없었다. 뻐드렁니와 두부는 우리를 앉혀놓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들은 외견상 묘한 대조를 이루며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 미래공업에서는 말여, 이 형님이 남바원이니까 대들 생각 말아라. 알겠냐?”
두부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뻐드렁니는 두부의 배를 걷어찼다. 두부는 과장된 몸짓으로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무표정한 우리 앞에서 장난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들이 험악한 장난을 치면 칠수록 철규의 표정은 굳어갔다.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뻐드렁니는 배를 잡고 웃었다.
“어제 혜지 쉬는 날이었잖아, 이 돌대가리야!”
“아, 그랬능교? 난 그것도 모르고…….”
“니가 아무리 죽을 똥을 쌈시롱 들이대도 혜지는 끄덕도 안 한다.”
“성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꺼!”
갑자기 누군가 벽을 쿵,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시선이 구석으로 쏠렸다. 이불 위에 앉아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리던 사내였다. 장발에 안경을 쓴 모습이 흡사 늙은 기타리스트 같았다.
“조용히좀 합시다!”
“어이, 강 사장! 지금 뭐라고? 조용히 하자고?”
뻐드렁니는 남자를 강 사장이라 불렀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그는 조각칼로 벽을 쿵쿵 찍어댔다.
“시끄러워서 작업을 할 수가 있어야지, 원.”
신문지 위에는 깎인 나무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있었다.
“일이나 똑바로 하지, 숙소 들어와서 무슨 작업은 작업이야, 씻팔.”
뻐드렁니가 벌떡 일어섰다. 두부가 앞을 막아서며 분위기를 중재하려 했다. 그때 방 안으로 벌거벗은 거구의 청년이 들어왔다. 족히 백 킬로그램은 넘을 것 같았다.
“아, 거참. 아저씨들! 또 싸워요? 동네 시끄럽게, 진짜. 빨래할 거 있으면 얼른 내놔요.”
두부가 나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철규와 나는 승냥이 소굴에서 나와 거실에 가 앉았다. 바닥에 사내들이 벗어놓은 안전모와 신발, 조끼, 각반이 흙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 청년은 빨랫줄에서 팬티 하나를 집어 입으며 말했다.
“어리버리까지 말고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내일부터 하면 돼. 일 끝나고 돌아오면 아저씨들이 옷이랑 신발 같은 거 여기다 다 팽겨쳐놓는단 말야. 그럼 신발이랑 안전모는 신발장에 정리해서 넣고, 옷은 한 번에 다 모아서 세탁기에 넣으면 돼. 알았지? 세탁기 다 돌아가면 꺼내서 빨랫줄에 널구.”
청년은 자신을 흥준이라고 소개했다.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데다가 오래 일한 것 같아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숙소생활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눈치껏 빨래를 개고 청소를 했다. 뻐드렁니와 두부는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철규는 현관 앞에서 여자 친구와 오랫동안 통화했다. 싸웠다더니만 하루 만에 보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숙소 안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나는 흥준 옆에 가 앉았다.
“저… 물어볼게 하나 있는데요…. 안에 계신 분은 뭐하는 사람이죠?”
“강 사장 아저씨?”
“네. 사장님이세요?”
“하! 이놈 진짜 웃기네. 너 초짜지? 상식적으로 사장이 공사판에서 일을 하겠냐? 옛날에 무슨 사장이었다는데, 회사 쫄딱 망해먹고 여기 들어온 거 아냐. 나보다 현장 경력도 딸려. 소장이랑 아는 사이라서 들어온 건데, 나사 하나 박는데 십 분씩 걸리질 않나, 꼴에 나이 많다고 툭툭 옷 벗어놓는 꼬락서니가 진짜 진상이야, 진상.”
흥준은 앞으로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강 사장이 시킨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려도 무방하다는 거였다. 어차피 작업은 두부와 흥준 위주로 진행된다고 했다. 뻐드렁니는 일은 하지 않고 온종일 잔소리만 늘어놓는다며 작업장의 시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비꼬았다. 이른바 현장에서도 줄타기라는 것이 있는데 기술이 좋고 인맥이 넓은 아저씨 밑에서 일을 해야지, 뻐드렁니 같은 사내를 따라다니다 보면 그와 똑같아질 뿐이라는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흥준은 벌써 출출해졌다며 숙소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방을 베고 드러누워 강 사장 아저씨가 있는 안방 쪽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을 꺼버렸는지 깜깜했다.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가 켜졌다. 조각칼로 나무껍질을 벗겨내는 소리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날 밤, 나는 아버지 등에 팔팔 끓는 주전자 물을 부었다. 한창 주무시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작은방으로 달려왔을 땐 아버지는 이미 실성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쇠끓는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 부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 등줄기에는 아직 그 흉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질질 끌고 나가고 난 뒤, 나는 아버지가 밤낮으로 매달렸던 게임기를 부쉈다. 목재 외장을 뜯어내고 14인치 브라운관을 꺼내서 창밖으로 내던져버렸다. 1층으로 내려가 주인집 주차장에 쌓아놓은 재고 게임기들도 전부다 부숴버렸다. 오랫동안 출고시킨 적이 없는지라 곰팡이 냄새가 다세대주택 전체에 진동했다. 새파란 방수천을 걷어내자 모기떼들이 일제히 날라들었다. 일흔 다섯 대의 게임기를 죄다 부수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가 나를 할퀴고 때렸다. 그때 난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빌린 돈과 전세를 얻기 위해 절대로 쓰지 않으려 했던 돈을 합쳐 아버지 사업자금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고 트럭을 구입하고 업자로부터 게임기 백 대를 인수받아 학교 앞 문방구나 슈퍼에 대당 이만 원씩 받고 임대해주었다. 내가 열두 살이었던 해 겨울, 우리 가족은 트럭을 타고 수덕사로 여행을 갔다. 주차장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손을 비벼가며 라면을 끓여 먹었다. 대웅전 앞에서 찍은 사진이 넷이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이제 막 곱셈을 배운 동생은 게임기 백 대가 더 있으면 한 달에 사백만 원씩 벌 수 있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겨울방학 동안 동생과 나는 손을 꼭 잡고 돌아다니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전단지를 돌렸다. 어머니는 종이컵 공장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백 대가 모두 거래처에 모두 나가 있던 기간은 첫 한 달 뿐이었다. 게임기는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다. 장독처럼 옹기종기 모여들더니 차곡차곡 쌓여 아파트가 되었다. 어머니는 다시 공장에 나갔고 아버지는 게임에 중독되어갔다.

구둣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군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철규를 깨워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어보니 술에 잔뜩 취한 두부가 서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내 따귀를 때리고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렸다. 두부는 웃통을 벗어 팽개치고는 물컹한 속살을 출렁거리며 자는 사람들을 모두 깨웠다. 철규와 흥준은 거실 텔레비전이 쓰러져 박살났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귀찮아서 눈을 감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안방에서 뻐드렁니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두부의 팔을 비틀어 제압하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브라운관 조각을 치우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두 사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둘은 단순한 동료사이가 아니라 사돈지간이었다. 뻐드렁니는 두부의 누나와 재혼했는데, 결혼할 당시엔 처가 쪽에선 여태껏 재혼 사실을 몰랐다. 처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친 뻐드렁니의 과거를 두부가 알아버린 거였다. 두부는 불쌍한 내 누나 책임지라고 뻐드렁니를 몰아붙였다. 한동안 으르릉거리던 사내들은 어느 순간부턴가 차분해졌다. 도깨비 수다 떠는 소리처럼 두런두런 들려오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구둣발로 싱크대를 걷어차는 시끄러운 소리. 소장은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재빨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소장의 차에 올라탔다. 뻐드렁니와 두부가 긴 하품을 흘리며 나올 때까지 철규는 나오지 않았다. 철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두부는 철규의 귀를 비틀어 잡았다.
“아아아, 이거 놓으이소!”
“늬들이 시방 늦잠 쳐잘 때여? 군대로 치면 우린 병장이고 늬들은 이등병이나 마찬가지거여!”
현장으로 가는 동안 뻐드렁니는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다. 밑바닥 인생을 오래 산 사람에게서 한 가지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귀를 기울였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술에서 덜 깬 건지 원래 그런 건지,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나와 철규를 괴롭혔다. 앞자리에 앉은 흥준도 짜증이 났는지 창문을 열어두고 담배를 피웠다. 소장은 차에서 냄새난다며 불을 끄게 했다. 조용한 사람은 강 사장이었다. 자식을 잃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에서 나는 어떤 잔상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LG필립스 LCD공장이었다. LG와 필립스가 합작하여 LCD패널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했다. 현장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 앞의 함바집 개수를 보고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벌판에 수십 채의 가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뿐만 아니라 옷장수, 보험 외판원, 자동차용품 판매원 등 현장에 드나드는 인부를 상대로 물건을 파려는 사람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철규는 식사를 포기하고 한쪽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 바빴다. 나도 별 입맛은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배를 채웠다.
소개소에서는 초보자에게 칸막이 일을 추천한다. 자재가 무겁지 않은데다가 야근이 많아서 초보라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현장 작업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아침 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난 뒤, 소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어제 보일러실 끝냈고 오늘부터 기계실 외벽 들어간다.”
“일도 끝나고, 신참도 들어왔는데 회식 한 번 하입시더.”
두부가 말했다. 흥준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시끄러. 오늘 엘시디 로봇이 기계실에 들어오는데, 최대한 빨리 해줘야 돼. 그 기계가 대당 일 억 짜리야. 너희들 다 팔아도 로봇 한 대 못 산다. 먼지가 요만큼이라도 들어가면 나 죽고 너희들 다 죽는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소장님, 설마 저번처럼 주말에까지…”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기계실 끝날 때까지 계속 야근이야. 일요일이고 뭐고 없어, 우린! 나 잠깐 위에 올라가서 서류 처리좀 하고 올 테니까. 너희들은 나 따라와.”
소장은 강 사장 아저씨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현장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갔다가 끝날 때 쯤 올 거면 아예 오질 말든가….”
뻐드렁니는 투덜대며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었다. 모두들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늬들 뭐해? 얼른 소장님 쫓아가!”
흥준의 말에 쭈뼛거리며 서 있던 철규와 나는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전 동안 신체검사와 안전 교육을 받았다.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고 몇몇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점심식사 후 둘만 남게 되자 철규는 기다려왔다는 듯 불만을 토해냈다.
“내는 노동일이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데이. 방위산업체 3년, 거기 일도 억수로 고되가꼬 뭐빠지게 고생했다카이. 그냥 다니던 학교나 다녀야겠구마.”
“힘들긴 뭐가 힘들어요? 오전 내내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마, 그래도 사람들 돌아다니는 걸 보면 다 안다 아이가. 같이 숙소 쓰는 사람들도 영 시원찮고….”
“형,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뭔데?”
“제가 사람을 하나 찾고 있거든요. 현장 오다가다 혹시 눈에 띄거든 알려주세요. 여기 제일 끝에 선 남자예요.”
나는 코팅한 사진을 내밀었다.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져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철규는 그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이게 누군데?”
“……사기꾼인데요. 우리 집 돈 갖고 날랐어요.”
“얼마를 갖고 날랐는데?”
“저도 어렸을 때라서 기억은 잘 안나요.”
“아무튼 나쁜 시끼네. 나야 뭐 한 학기 용돈 번다고 여기 와있지만은…. 니도 참….”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 있으면 저한테 알려줘요. 알았죠? 사진은 형이 갖고 있어요.”
철규는 사진을 지갑 속에 넣었다. 오후 작업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철규는 그 음악소리에 벌써 질려버렸는지 귀를 틀어막았다. 현장 곳곳,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낮잠을 자던 인부들이 하나둘 씩 나타났다. 제각기 넓은 박스 한 장씩을 든 모습이었다.
기계실은 접근제한구역이라 문을 여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LCD로봇 한 대가 비닐에 쌓인 채 안쪽에 놓여있었는데 책임자는 그 앞에서 숨도 못 쉬게 했다. 두부와 흥준의 주도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계는 이미 어젯밤에 설치되었기에 H빔을 올리는 작업을 했다. 철규와 나는 자재 창고에서 H빔을 쉴 새 없이 가져다 날랐다. H빔을 세워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석고보드를 박아 외벽을 만드려는 것 같았다. 비슷한 작업을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다른 일도 시키면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라도 잡일을 해야했다. 그래야 더 많은 인부들을 훑어 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나를 포옹하려는 새아버지를, 어머니는 옷깃을 끌어당겨 말렸다. 뜨거운 물을 붓던 모습이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새아버지는 반쯤 벗겨진 머리에 인상 좋고 맘씨 착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배터지게 돼지갈비를 먹고 나서야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로 이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머니는 배 채워 주는 사람이 아버지지 굶기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어떻게 만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동생이 이런저런 추측을 하지만 어머니 쪽에서 새아버지에게 먼저 접근을 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내 심연 속에 잠겨 있었다. 일찍 시집 간 동생이 아들을 낳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새아버지와 어머니 뒤로 우두커니 서있는데 그 기억이 떠올랐다.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갈 것인지 새아버지에게서 일을 배울 것인지 고민하던 때였다. 해쓱해진 동생을 휠체어에 태워 신생아실로 데려가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아기 신발을 들고 있던 어머니는 네가 애 낳았냐며 면박을 줬다. 나를 대신해 새아버지가 동생의 휠체어를 밀었다. 뒤늦게 달려온 매제가 나를 보고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가 아버님은요? 하고 묻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달 뒤 집을 나섰다. 처음 하는 가출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무서웠다. 친척 어른에게서 그가 공사현장을 전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현장 사무소 리스트를 뽑아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이름의 남자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한 달 만에 포기하고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광주 큰아버지 댁에 내려가 위치를 알려달라고 졸랐지만 큰아버지도 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줄은 모른다고, 일 년에 두어 번 연락 올 뿐이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현장을 떠돌기 시작해 아홉 달이 넘었다. 가족들에게는 지방 친구 집에 머물며 회사에 다닌다고 둘러댔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강찬중이라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던 한 인부의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었다.

H빔을 철규와 둘이서 들쳐 매고 기계실로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각종 도구들이 널려 있는 걸로 봐서 일을 끝낸 것 같지도 않았다.
“진수야, 일 끝났는갑다. 우리도 얼른 가자!”
“잠깐만요. 끝날 시간이 아닌데….”
위를 올려다보니 사내들이 천장 쪽 두꺼운 파이프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철규는 한 대 얻어 피우겠다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사내들은 조끼를 벗은 채로 쉬고 있었다. 나는 강 사장 아저씨의 몸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위로 올라갔다.
아래는 시원했지만 위쪽은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굉장히 더웠다. 나는 강 사장 아저씨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앉았다. 담배를 한 대 막 물고 피우려는데 뻐드렁니가 화를 냈다.
“한 놈은 밑에서 망 봐야지, 둘 다 쳐올라오고 있냐!”
“안전요원한테 걸리면 오늘 일당 날리는 거야, 임마!”
철규는 이미 담배를 반쯤 피웠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다른 곳으로 눈을 피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안전요원 둘이 순찰차 와있었다. 강 사장 아저씨가 말했다.
“이 정도 높이면 밑에서 안 보여.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잔말 말고 내려가 봐. 밑에 아무도 없으면 이상하잖아.”
뻐드렁니가 말했다. 내가 아래쪽 파이프로 내려가려는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작업장 밑에 널린 크고 투박한 장비들이 눈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안전요원이 밑에 있으니까 곧장 응급실로 실려가겠구나. 그래도 너무 높은데! 이젠 끝이구나, 눈을 질끈 감으려는데 억센 손이 내 옷덜미를 끌어 잡았다.
“정신 차려!”
강 사장이었다. 그가 잡아준 덕에 간신히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터와 담배를 놓쳐 버렸다.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가 두 안전요원 사이로 툭 떨어졌다. 곧, 호루라기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제일 먼저 밑으로 내려간 사람은 뻐드렁니였다. 온몸이 쑤시다며 나사못 몇 개조차 날더러 가져오라던 그였다. 나는 뒤따라 내려가려고 했다. 어차피 담배와 라이터는 내 것이었다. 강 사장 아저씨가 내려가려는 나를 저지했다.
“기다려보자. 저 치가 힘은 없어도 주둥이는 잘 쓰니까.”
그 말에 두부가 낄낄거렸다. 다들 잘 되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헌데 밑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안전요원들은 아직 비닐포장을 벗기지 않은 LCD로봇 쪽을 가리키며 무언가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철규가 가지 말라고 날 끌어당겼지만 손을 뿌리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담배는 제가 피웠습니다.”
안전요원 하나가 내 손가락과 입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냄새 조금 나는데.”
“그럼 둘 다 피운 거로군! 저 기계가 얼마짜린 줄 알아요? 일억이에요, 일 억!”
“이 놈이 어디다 대고 삿대질이야!”
뻐드렁니가 내 앞에 있던 안전요원의 뺨을 후려쳤다. 안전요원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다른 안전요원이 달려왔다. 천장에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두부와 강 사장 아저씨, 흥준과 철규가 내려왔다. 간신히 뜯어말리고 나니 안전요원의 얼굴은 할퀸 자국으로 퉁퉁 부었다. 뻐드렁니는 시뻘게져서 씩씩대며 욕을 퍼부었다.

소장은 이번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는 해야 했기에 누군가 한 명은 일을 그만둬야 했다. 이튿날 우리는 작업장을 기계실에서 주차장으로 옮겼다. 대신 다른 팀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 정글과도 같은 이곳은 먹잇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하청업체가 수없이 많았다. 소장은 아마도 눈앞에 있던 큰 먹이를 빼앗기고 쫓겨난 기분일 터였다. 뻐드렁니는 어제의 실랑이로 허리를 삐끗한 것 같다며 병원에 갔다. 철규를 제외하고 모두 비계 위에 올라가 석고보드 한 장씩 잡고 드릴질을 했다.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라는 것이 소장의 주문사항이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수많은 파이프들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맨 꼭대기에는 강 사장 아저씨, 그 밑으로 나, 내 밑에는 흥준이 있었다. 철규는 석고보드를 날아왔고 두부는 그것들을 필요한 모양대로 잘랐주었다.
밑에서 올려준 석고보드를 받아 나사를 박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온몸을 적시는 땀이었다. 드럼통만 한 붉은 파이프가 내뿜는 열기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안전모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수시로 순찰하러 오는 안전요원들 때문에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했다. 조용한 가운데 전기드릴 소리만 들렸다. 종종 위에서 떨어진 나사못이 안전모 위로 떨어져 딱!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나사못이나 땀방울이나 비슷한 무게의 느낌이었다.
“진수야.”
한참 나사를 박고 있는데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강 사장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잠깐 쉬어라.”
“예.”
나는 비계 위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내 위층에 앉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저씨, 옛날에 사장이었다면서요?”
“…누가 그러디? 작은 공장 하나 했지. 사장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공장장이라면 모를까.”
“무슨 공장을 하셨는데요?”
“이거, 아시바.”
그는 안전모로 비계를 툭툭 쳤다. 나는 지갑에서 사진을 꺼냈다. 수덕사를 배경으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기억 속 아버지의 얼굴은 지워지고 없었다. 사진을 봐도 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십 년 사이 아버지가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옛날엔 좀 크게 했었지. 지금은 다 말아먹었지만.”
“밤에 뭘 만드시는 거예요? 조각칼 가지고….”
“아, 그거…. 우리 아들 주려고. 일곱 살짜리 늦둥이가 있거든.”
“…늦둥이요.”
“애엄마가 일 나가니까 큰딸이 엄마 역할하고 그래.”
“아저씨 이름이 혹시 강찬중 아니예요?”
“그건 왜?”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요.”
나는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아저씨는 안전모와 조끼를 벗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그 비슷한 이름도 못 들어보셨어요?”
“글쎄, 처음 듣는 것 같은데.”
“…….”
“난 이십 년 동안 비계를 만들었어. 근데 좀 허무하더라고. 벽돌이나 시멘트 같은 것도 아니고 이 비계는 말야, 공사 끝나고 나면 다 떼버리거든. 사람들은 비계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 이게 없으면 공사를 할 수도 없는데.”
“…….”
“내가 작업하면 왜 만날 이 꼭대기로 올라오는 줄 알아?”
“글쎄요….”
“비계 위에 서있으면 자꾸 엄마 생각나서 눈물이 나. 이 나이 먹고 궁상맞게. 나란 놈이 좀 멀쩡해져서 쓸 만해지니까 돌아가셨거든.”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나는 밑으로 내려왔다.

침울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흥준의 집요한 요구를 이기지 못한 소장은 우리를 고깃집으로 데리고 갔다. 철규는 원래 계획이 오늘 밤에 도망치는 거였는데 배불러서 못가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두부는 흥이 났는지 노래를 불렀다. 뻐드렁니가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그는 씩 웃으며 건달처럼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성님, 와 이리 늦게 왔는교?”
“간 김에 이것저것 다 검사받았지.”
“아이구, 저 썩을 놈. 저놈의 사기꾼 정신은 개도 못 줘.”
“소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한다요? 나한테 딸린 식솔이 한둘이 아닌데 몸 하나는 성하게 보존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그 몹쓸 등짝 하나로 부수입은 톡톡히 챙기는구나.”
“아따, 거 참! 무슨 섭한 소릴.”
다들 먹고 마시며 취해갔다. 숙소로 돌아와 떡볶이와 어묵을 사놓고 한 판 더 벌렸다. 모두들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 나는 새벽녘까지 잠들지 못했다. 속이 더부룩한 탓이었다. 체기가 쉬 내려가지 않았다. 실과 바늘을 찾아봤지만 다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세탁기 코드를 엄지손가락에 둘둘 말아 공업용 커터로 피를 냈다. 그러고도 구역질이 멈추질 않아 수 번 토하고 설사를 했다.
새벽 다섯 시. 배를 움켜쥐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철규의 조끼에서 지갑을 빼내어 그 안에 들어있던 사진을 챙겼다. 현관문을 열고나오니 벌써 동이 터오고 있었다. 가방을 들쳐 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다섯 시 사십 분 정도면 소장이 사람들을 깨우러 올 것이다. 시외버스는 이십 분이 넘도록 올 생각을 안 했다. 정류장 팻말을 보니 배차간격이 삼십 분이었다.
해가 완전히 떠서 빛나기 시작했다. 꿉꿉하면서도 상쾌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뻐드렁니였다. 당황한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라질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방을 감추고 쭈그려 앉았다. 시간이 이른데 약국이나 슈퍼에 갈리는 없었다. 뻐드렁니는 텅 빈 4차선 도로를 건넜다. 나한테 오는 거였다. 외진 곳이라 지나다니는 택시도 없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강찬중이다.”
“네?”
뻐드렁니는 헐거운 러닝셔츠를 벗고 등을 돌렸다. 피부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돌아섰다. 흰 봉투를 쥐어주며 말했다.
“뭐, 딱히 줄 건 없고… 이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멀리 버스가 오고 있었다. 봉투는 내 손을 빠져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거 새끼, 참!”
그는 봉투를 주워 내 가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돌반지나 하나 해라.”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섰다. 어느새 뒤에 와있던 할머니 한 분이 봇짐을 머리에 이고 버스에 올라탔다. 안 탈 거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리소! 얼른 타, 이놈아!”
나는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나를 끌고 함께 올라탔다. 나를 자리에 앉히고 요금을 낸 뒤 내 앞에 와 앉았다.
“안 춥소? 메리야스만 입고?”
“산삼 먹고 열났는갑제.”
버스기사의 물음에 할머니가 대신 답했다. 태양이 완전히 떠올라 버스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앞에 앉은 남자의 등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흉터가 간지러운지 벅벅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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