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신문’ 제1450호(2007. 10. 15)는 ‘정혜결사의 정신이 그립다’라는 사설을 싣고 있다. 이 사설에서 주장하는 논지에 대해서 새삼 왈가왈부 시비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혜결사의 정신을 파악하여 활용함에 있어서 그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점을 바로 잡으려 할 뿐이다. 우선, 그 사설에서 정혜결사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옮겨 보기로 한다.

“우리는 오늘 고려시대 지눌스님이 밝힌 정혜결사문의 정신이 새삼 그립다. 이 결사문은 지눌스님이 고려 말기 불교계의 타락상을 바로잡기 위해 제시한 치유책으로서 올바른 선정과 지혜를 닦아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독려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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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결사의 정신을 이렇게만 말해도 좋을까? 만약 그렇게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정혜결사의 정신을 죽이고 있다 아니할 수 없으리라. 물론, “올바른 선정과 지혜를 닦아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독려하는” 것 역시 정혜결사의 정신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고 만다면 정혜결사의 정신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빠지게 되고 만다. ‘정혜결사문’에서 그 해당 부분을 읽어보기로 하자.

“우리들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살펴보면, 불교를 빙자하여 내가 옳다거나 네가 옳다거나 하는 고집(我相人相)만을 키우며 이익의 길에서 구구하며 티끌세상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도 아니하면서 의식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그 당시 교단의 잘못된 모습의 핵심이 시비다툼(=권력)과 이익(=명리)의 추구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잘못된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 시비와 이익의 현장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정혜결사였다. 그래서 당시 권력과 명리의 추구자들이 모여있었던 수도 개성을 멀리 떠나 팔공산으로 은둔해 간 것이다.

따라서 시비다툼의 권력과 이익의 추구를 포기하자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정혜결사를 포함한 모든 결사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정과 지혜의 닦음은, 그런 뒤에 행하는 결사 중의 교육프로그램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김호성
인도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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