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족보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노비와 평민들이 양반 족보를 거짓말로 가지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기회가 원천적으로 제한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를 쓰면서 그 노비와 평민들의 윤리성을 문제 삼는 역사가가 있을까? 조선 후기의 문제점으로 족보 검증시스템 미비를 꼽는 역사가를 본 적이 있는가? 또, 장영실 등의 사례를 들면서 조선시대가 사실은 신분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를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식의 관점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학벌사회, 신분제사회

그런데 바로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얼마 전에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다. 유사신분제인 학벌사회에서 학력위조 사건이 터졌는데 사람들이 개인의 윤리성을 문제 삼고, 언론은 학벌·학력 없이도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느라 열을 올렸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 주류의 응답은 검증시스템 강화였다. 이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아마 우리 후대가 지금의 기록을 읽으며 크게 비웃을 것이다.

학벌사회가 신분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인종차별을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연고대·이대 그룹이 한국사회 상층부 거의 모두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여타의 서울지역 명문대 출신들이 나눠 먹는다.

그 밖에 있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돌아갈 자리는 거의 없다. 그러면 명문대 출신들만 지도층이 될 만한 우월한 인종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은 다수의 국민은 지적으로 열등한 인종이어서 평생 명문대 출신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신분제가 아니라면 이게 사실이란 말이 된다. 한국인이 사실은 다수의 열등인종과 소수의 우성인종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검증 강화=신분제 강화

이게 사실이라고 믿는 분에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난 이런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명문대 학벌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사회지도층이 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다. 명백한 신분제다. 신분제 구조에서 거짓말 열풍이 부는 건 당연하다. 이것을 막겠다고 검증시스템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신분제를 강화하자는 말밖에 안 된다.

학벌의 실체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입시성적이다. 이것은 사회를 지도할 능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게다가 그 입시성적이란 것은 부모의 재산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연동된다. 부모의 재산은 본인의 능력과 더더욱이나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학벌은 무시할 대상이지 검증할 대상이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학벌검증보다 위조가 더 윤리적이고 생산적일 수도 있다. 부모재산과 연동된 입시성적이라는 거짓말을 깨는 것이니까. 또 나중에 위조할 수 있다면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국가적 해악인 입시공부를 안 해도 되고 사교육비를 안 써도 되니까. 물론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학벌신분제를 아예 철폐하는 것이다.

대학서열 평준화 필요

그것은 학벌을 생산하는 대학서열을 평준화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중등과정 성적으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제도를 없애고 전면적인 능력경쟁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오직 대중과 학생의 봉기로만 가능한 일대 혁명이다.

사교육비에 투여할 자원을 보유, 중등과정 입시경쟁 체제가 유리한 구체제의 기득권세력은 전심전력으로 역사의 전진을 막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면 저항을 뚫을 수 있다.

11월 24일엔 대학평준화를 요구하는 한국역사상 최초의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날부터 새 역사를 여는 일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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