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로가 여쭈었다. “좋은 말을 들으면 곧 실행해야 합니까?”
공자 말씀하셨다. “부형이 계신데 어찌 여쭈지 않고 듣는 즉시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여쭈었다. “좋은 말은 들으면 곧 실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아무렴! 듣는 즉시 행해야지.”

그러자 공서화가 여쭈었다. “자로가 물으니 ‘부형이 계시다’ 하시고, 염유가 물으니 ‘즉시 행하라’ 하시니 혼란스러워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 말씀하셨다. “염구는 물러서기 때문에 나아가도록 한 것이고, 자로는 남보다 지나치기 때문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

이른바 ‘사람에 따라 가르침을 다르게 베푸는’ 공자의 교육방법이다.
교육문제는 우리사회 제일의 화두이자 관심인 동시에 가장 모순적 문제이다. 초·중등교육은 입시지옥, 고등교육은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진리의 상아탑’ 또는 ‘비판적 지성의 전당’과 같은 대학의 본질적인 기능들이 상당히 퇴색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교수에게 반드시 보장돼야 할 학문연구의 자율성과 교수법의 고수, 학생들이 누려할 선택적 교육에 대한 권리 또한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학교 필수교양강좌의 경우 같은 과목이 적게는 2개부터 많게는 10개 이상 동시에 개설된다. 작문과발표, 고전세미나 등의 필수 교양과목은 과목별 책임교수를 정한 다음 책임교수 주제 하에 강좌를 맡게 될 교수들이 모여 수업에 대한 회의를 하고 ‘공통강의계획서’를 만든다. 한 과목을 분반한 것이기 때문에 수업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서다. 결국 수업방법과 진도를 ‘표준강의’대로 맞추어 나가자는 의도다. 획일화된 강의계획서를 뽑아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담당 교수는 자신만의 개별 강의계획서를 다시 나눠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 중ㆍ고등학교 교육은 똑같은 교과서와 정해진 진도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의 창의성과 개성을 배제하며 오직 ‘대학입시’만을 목표로 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공통강의계획서’는 획일화된 교육의 연장선이 아닐까. 같은 과목이라도 가르치는 교수에 따라 교수법이 다르고 듣는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자신이 연구하고 개발한 교육방법이 바뀔 수 있다. 또 학생들은 교수 개개인의 독특한 색깔이 있는 수업스타일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학문에 대한 다양성과 자율성을 기본으로 하는 대학의 본질을 어쩌면 우리는 잊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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