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에도(江戶)시대는 거의 전쟁이 없었던 평화시대였다. 무사라는 계급이 장군을 필두로 하는 봉건제후(다이묘[大名], 보통 만석 이상의 쌀이 생산되는 영지의 독립적인 통치권자)들의 주축을 이루어 통치하고 있었다. 무사가 칼은 차고 있었지만 특별히 사용할 일이 없었던 시대가 되고 약 100년 후, 무사들의 집단복수극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사는 능력에 따른 대우를 받으며 주종관계로서 제후에 소속되고, 이들 제후는 다시 장군을 맹주로 하는 막부체제에 소속된다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막부는 제후를 통제하기 위하여 장군이 사는 에도(도쿄)에 일정 기간 이상 머무르게 하였고, 제후들은 장군이 있는 에도성의 여러 의식에 참가하게 된다. 평화시대가 지속되면 권위가 앞서가고 의식(예의작법)도 매우 복잡해진다. 제후 사이에는 노소, 신구, 영지의 대소 등의 차이로 알력이 발생할 수 있는데 사건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1701년 3월 14일, 제후 중 기라(吉良, 61세)에게 원한을 품은 아사노(淺野, 35세)가 그만 1년 중 가장 격식이 높은 행사를 하는 에도성에서 기라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게 되고, 이로 인하여 같은 날 장군의 명령으로 할복한다. 칼부림으로 인해 아사노는 하루아침에 할복자결을 하고 자신의 영지(赤穗藩[아꼬방])는 막부에게 몰수되어 버렸으며, 그 밑의 무사들도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떠도는 신세(浪人[로우닌] 또는 浪士[로우시])가 되었다.


이들(300명 정도라고 함) 중 47인은 오이시(大石)를 우두머리로 하여 1702년 12월 14일에 아사노의 원수로 지목된 기라의 에도 저택에 야밤 기습 공격을 하여 기라를 살해함으로써 복수극을 완성한다. 이 중 46인(1명은 이탈)은 거사 4일 후 막부의 명령에 의해 모두 할복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일본인들은 대개 47인의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들을 좋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쮸신구라(忠臣藏)라고 불리는 유명한 전통 공연극이 되었고 그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물론 한밤의 복수혈전이고, 설욕한다는 점에서 그런지 눈 내리는 날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반면으로 47인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견해도 적지 않다.


여기서 47인의 행동의 관하여는 별개로 하고 일단 아사노의 인간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생각해 보자. 미리 아사노가 기라와의 관계를 잘 갖고 있었다든지 적어도 아사노가 꾹 참고 넘어갔다면, 그 후 자신이 할복을 하거나 영지를 잃거나 나아가 부하들이 1년 이상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에도 한복판에서 복수혈전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사노가 기라에게 어떠한 원한을 품었는지 지금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원한을 미리 품지 않도록 잘 처신하였다면, 기라의 나이를 생각해서 조금만 참고 넘어 갔다면, 이렇게 큰 대가는 치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사노에게도 할 말은 많겠지만 자신의 행동이 인간관계에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