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 연극학과 교수
춘추전국시대부터 배우(俳優)의 우희(優戲)는 골계의 형식을 통해 왕에게 간언(諫言)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우간(優諫)이라 한다. 보통 골계희(滑稽戲), 창우희, 우희, 소학지희, 시사희라고 불린 우희는 배우가 시사적(時事的)인 사건 혹은 개인을 풍자한다해도 “말하는 자는 죄가 되지 않고, 듣는 자는 족히 경계할 만하다(言之者無罪,聞之者足以戒)”고 여겼다. 우리나라 선조들도 배우의 기능을 논하는데 있어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서, “옛부터 우희에서 하는 말은 구경하고 웃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교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함이라고 했고,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배우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공박할 수 있다.
 

또는 “배우도 또한 백성에게 유익함이 있다(優亦有益於民矣)”라고 하여 당시의 불문화된 규율은, 배우가 비록 잘못 말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의 특권이 재난 된 경우가 있었다.『곡양전穀梁傳』定公 10년에, 공자가 협곡(頰谷)의 회합에서 제(齊)나라 사람이 우시(優施)로 하여금 노(魯)나라 임금의 막하에서 춤을 추게 하고 우희를 하게 하였는데 공자는 이때 군자를 비웃는 자는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하여 우시의 수족이 잘려 문밖으로 던져지게 되었다(笑君者罪當死! 使司馬行法焉, 手足異門而出) 그 후 공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았다. 우리나라 역시 간언할 수 있는 특권으로 인해 목숨은 붙어 있었을망정 곤장을 백대를 맞고 귀양살이를 가야 했던 인물이 연극 <이(爾)>를 시초로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공길(孔吉)이다. 그는 1504년 <연산군일기>에서 “전하는 요순같은 임금이요 저는 고요(皐陶)같은 신하입니다. 요순과 같은 임금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고요와 같은 신하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 권3에, 고려 장사랑(長仕郞) 영태(永泰)가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사냥을 갔을 때도 늘 우희(優戱)를 하니, 임금은 그를 물속에 던져 버렸다. 영태가 물을 헤치고 나오니, 임금은 크게 웃으며, “너는 어디로 갔다가 지금 어디서 오느냐.” 하니, 영태는 “굴원(屈原)을 보러 갔다가 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굴원이 뭐라고 하드냐.”하니, “굴원이, ‘나는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몸을 강에 던져 죽었지만, 너는 명군(明君)을 만났는데 어찌 되어 왔느냐.’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은 기뻐서 은구(銀甌) 하나를 주었다.


이처럼 배우는 코믹한 언동으로 연극이라는 틀을 빌려 한 시대의 문제들을 일깨워줌으로써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아우구스또 보알의 ‘보이지 않는 연극’을 상기한다면 우희의 간언은 연극이 현실을 인식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꿀 수 있는 실천적인 무기였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보알은 연극을 철저히 민중 속으로 가져갔다. 가령, 브라질의 한 호텔 식당에서 바비큐를 시켜 먹고, 돈이 없다면서 대신 일을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여 지배인과 실갱이를 벌려 식사중인 4백여 명의 손님으로 하여금 이 식당 청소부의 월급이 매우 낮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보알의 ‘보이지 않는 연극’이다. 배우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바베큐를 먹어치우는 데는 겨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값을 치르기 위해 10시간을 일해야 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청소부의 월급을 올려주든지 바베큐 값을 내리든지 해야 할 것 아니요?” 라며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큰소리로 떠든다. 손님들은 마치 연극배우 같은 그 사람의 호소에 웃기도 하고 동정도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청소부의 월급 문제를 떠들기 시작한다. “그렇군. 너무 적게 받고 있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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