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다.


여느 해처럼 수능시험장에 감독관으로 나갔는데 모두가 여학생들이었다. 나 자신이 여고에 근무하고 있는지라 수험생들에 대한 친근감과 애틋함이 더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1교시가 시작되고 깊은 정적과 함께 시간이 흘렀고, 어느 새 시험 종료 10분전 예고 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시험도중 퇴실할 수 없다고 말해주고 가까이 가보니 아직 풀지 않은 문항이 10문제 이상 남아있었고 OMR 카드는 전혀 작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줬지만 1교시 종료 후 답안지를 제출한 후 그 수험생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1교시의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그 여학생은 나머지 시험마저 포기해 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이 250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이미 한 마리의 소를 잃었으니 완전한 것이 못되니 이 소를 어디 쓰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남은 소들을 깊은 구덩이와 높은 언덕으로 몰고 가서 모두 죽여 버렸다. ‘백유경’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여기 등장하는 250마리의 소는 스님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지키는 250가지 계율의 조목들을 비유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한 가지를 파계하고는 어차피 완전함이 깨졌으니 나머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소용없다고 생각하여 나머지 249가지 계율을 모두 버리는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올 해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언어영역 문항수가 60문항에서 50문항으로 줄고, 시험시간은 90분에서 80분으로 줄어든다. 지난 달 14일에 달라진 체제를 적용한 첫 번째 전국연합 학력평가를 치렀다. 문항수가 줄고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힘들어 한다. 제도와 환경이 개선되면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자신감의 원천은 역시 마음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비단 올해 대입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뿐이겠는가. 누구나 소 한 마리를 잃었다고 나머지 소 떼를 모두 죽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리라.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now here) 포기하면 희망은 그 어디에도 없다(no where). 지난 일에 마음을 빼앗겨 미래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학주
사범대학 부속여고 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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