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지만 잔인하고 주지만 빼앗아가고 너이지만 네 안의 나이다.
이유이면서 조건이고 치정(治定)이면서 식민지이며 탐구인 동시에 염탐이다.
사랑 앞에서 권리는 이렇게 낮 동안의 부귀영화였다가 처연하게 이지러지는 달처럼 기울어진다. 첫눈에 반한 사랑, 그 치명적인 유혹의 아픈 대가는 그러므로 치를 수도 피할 수도 또는 무책임하게 빌려서 수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클로저(Closer)’는 사랑의 본질이 가진 이중성을 무표정하게 비튼다. 앨리스는 사랑에 집착했지만 또한 배신한다. 그녀는 가볍게 왔다가 무겁게 사랑하고 다시 가볍게 회귀한다. 지독한 사랑의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는 앨리스는 댄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 어쩌면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제인 존스라는 이름으로 돌아간 그녀에게 사랑의 추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랑은 말로서 이미 그 시작을 알리고 입을 닫는 순간 목적지에 도달한다. 빛이 우주를 통과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랑의 시발을 두고 우린 흔히 첫눈에 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앨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이라는 함정에서 즐거워하고 교태를 부리다가 오묘한 그 단어에 천착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매번 새롭고 매번 지루하며 매번 운명으로 다가온다.
여기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등장해 좀 더 병적으로 집착한다. 게다가 진정한 사랑은 단 한번 뿐이라고 강조한다. 지독하다. 그런 인우 역시 첫눈에 빠져 들어가서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신화처럼 일궈낸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잔인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지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마땅한 정당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린다 해도 끝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우에게 태희는 상치된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니며, 번지점프를 하듯 운명의 도약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기실은 영화가 가지는 모종의 희망일수 있는 것이다. 인우가 사랑하는 태희가 현빈의 몸을 빌려 환생을 했느냐 안했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다.
앨리스나 인우와 같이 우리는 울고 웃으며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아슬아슬한 사랑의 곡예에 몸을 맡긴다. 인간의 이중성과 집착이 왜곡된 자기사랑의 모순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또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점은 참으로 허망하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무척 다행이다. 댄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기적이야, 더 행복해지고 싶어”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