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시집 ‘까마귀떼’
(문학동네, 2002)

이 시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동양의 시학(詩學)’이라 불리는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저자 유협이다. 그가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해 말한 것이 있는데, 대강을 간추리자면 이렇다. “한 사람의 시인이 좋은 문집 하나를 남기고 떠난다면 더 없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설혹 그렇게는 못되어도 혼이 실린 작품 한 편쯤 두고 갈 수 있다면 그는 글 쓰는 자의 구실을 제대로 했다고 할 것이다. 아니, ‘빼어난 구절(佳句)’ 하나만 남기고 간대도 그는 길이 칭송받아 마땅하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이 빼어난 노래 하나로 시사(詩史)에 빛나는 시인이 여기 있다. 이 시 한편 읽는 것이 그의 전집(全集)이나 평전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함형수(咸亨洙;1916-1946)’. 그에 관한 내 기억 중엔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문학 모임에서 건축가 한 사람이 이 작품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을 멋지게 암송하던 장면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시를 읊고 난 그가 덧붙이던 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제가 이런 시를 남기고 간 시인과 같은 나라 사람이란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렇다. 우리나라, 동국(東國)은 시의 나라다.

윤 제 림
시인,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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