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토말부락
마음 끝에 서서 보면
보인다.
다도해 먼 섬들 뒤
은밀하게 조금 더 작은 얼굴 숨기고 있는
그 섬의 후미진 둑길에
오일장날 장꾼들처럼 군데군데 모여서서 흩어져서
핀, 제 기쁨에 넋 놓고 핀
흩생각 자운영꽃들
오전 이른 햇살이 씻겨주는 환한
그 이맛전들.

오늘 이 투명한 날씨는 누구에게 드리는 사랑인가
누구에게 목매단 그리움인가.


-시집 ‘자화상을 위하여’(2002년 세계사)에서

‘자운영’ 시는 그의 시집 전편에 흐르는 음울하고 환멸적인 풍경들을 단번에 지우는 맑은 햇살과 같은 작품이다. “마음 끝에 서서 보면” 보인다니! 시인이 언제 한 번 마음 끝에 안 서 본 적이 있던가? 다도해 먼 섬들 뒤에 은밀하게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작은 섬의 후미진 둑길에 자운영 꽃들이 피어 있다고 상상한다. 보랏빛 꽃순이 농밀한 유혹을 방울방울 잎사귀 사이마다 틔우는 덩굴손들, 그 진초록의 기운을 마시면 황소의 붉은 혓바닥 감촉을 느낄 만도 하다. 제 기쁨에 넋 놓고 피어 있는 자운영 꽃들은 시인이 지금까지 부정과 환멸의 시선으로 안타까와 했던 것들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가는 가족과 농촌 사회, 도시 변두리의 일상적 삶의 꿈들이다. 오일 날 장꾼들처럼 군데군데 모여서 핀 자운영꽃들을 더욱 환하게 씻겨주는 햇살, 투명한 날씨는 시인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인 시대였고 사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이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들이 아직도 저 먼 작은 섬에 숨어 있음을 확인하며 그리워 한다. ‘K에게’란 부제 역시 절실한 소망을 숨기는 한 장치이리라.
홍 신선(1944~) 시인은 시집 자서에서 “농경문화 세대의 맨 후미에 처져 있다가 산업사회와 IT사회의 변두리에까지 떠밀려, 세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갈가리 찢긴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의 내면 속으로 떠도는 섬들을 기록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은 중용의 마음이다. 다소 소시민적인 에스프리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회적 변혁기의 고민과 폐허의식이 어느 지식인 못지않게 치열했음을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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