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해가 이울면
세월의 물결에 부딪쳐
바스라져 나간 어깨 한 켠이 쓰리고

밤이 깊으면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지만

나는 편히 쉴 수도
까무라치고 죽을 수도 없었다.

우리의 궁성이 불 탈 때
성 안에 가득한 아픔 같은 연기 속에서
내 가슴에 옮겨 붙은 불길은
아직도 타고 있는데,

백마강 찬 물을
마르도록 퍼다가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데 …

(후략)

- 시집 ‘백제 가는 길’
(1991년, 문학예술사)에서


떠도는 풍경들과 자아의 상상력을 맞닥뜨려 한 편의 시를 짓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 효치 시인만큼 풍물들과 특별한 감동으로 쉽게 소통하는 시인도 드물다. 아마도 시인 자신이 평소에 대상과의 소통에 대해 강렬하게 소망했고, 한 때 겪었던 무병과 같은 비의적 경험을 많이 축적했기 때문이리라. 숱하게 걷고 떠돌면서 뭇 사물, 뭇 영혼들과 부단히 교감한 때문일 것이다. 결국 문 효치 시인이 도달해 이른 곳은 ‘백제’였다.
‘백제탑의 말’에서처럼 은유화된 백제돌탑의 어깨 한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고, 돌탑의 아래 언저리인 발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지만, 시인의 가슴에 옮겨 붙은 백제의 불길은 아직도 타고 있다는 언설이 그의 시의 현주소다. 무참히 짓밟힌 백제의 영혼들, 그 한 맺힌 원한의 울음소리를 계백 장군 칼의 쇠울음 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는 기막힌 현실이다. 시인은 백제로 가는 길목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깨어진 기와 조각 하나, 허물어진 성터, 이끼 낀 돌탑 등 무릎 꿇은 억조창생의 울부짖음을 그냥 지나지 못한다. 까무라치거나 죽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라, 아직도 시인의 가슴에 옮겨 붙은 불길의, 현재의 시간으로 백제를 불러들이고 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신라의 시인이라면, 문 시인은 가히 백제의 시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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