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공허한 관념의 유희로 인해 독자들의 외면을 받던 시적 빈곤의 시대에 민중들의 삶의 실상을 민중적 언어로 노래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개척함으로써 우리 시에 활로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신경림 시인의 초기 작품이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는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농무나 춘다.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해서 술이라도 마시고 악을 써댈 수밖에 없다. 결코 낯선 세계가 아니다. 근대화 이행기의 피폐해진 농촌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농무의 현장을 묘사적으로 보여주다가, 홍명희의 ‘임꺽정’을 슬쩍 끌어들임으로써 불온한 혁명이라도 꿈꿀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신명은 여기서 비롯된다. 못 생긴 것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는 민중들에 대한 진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없는 꿈들을 꾸는 데 있다. 보잘 것 없이 초라한 농민들이 모여 날라리를 불고 팔다리를 흔든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 희누런 광목 포장이 둘러친 리사무소 앞마당에서 영화도 보고, 서커스도 보면서 자랐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꿈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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