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사람들은 ‘더불어’ 살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을 ‘만남’(Encounter)이라고 규정한 앙리 드 루바크는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모여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속의 질서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불협화음은 이 건강한 관계들을 무너뜨릴 때 생기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윤리적 동물이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금수보다 못한 양면성을 지녔다는 언급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는 선진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또 그 선진화의 기준이 GNP 등 돈으로만 환산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선진화의 선결요건은 경제적 풍요이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는 정신적 가치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제 몫을 다한다. 도덕시험을 잘 친다고 반드시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돈이 많다고 해서 꼭 선진국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가치세계로의 침잠(沈潛)을 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혹자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농경적 사회질서 속에서 형성된 고리타분한 질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은 ‘해석’의 문제이지 ‘이념’만은 아니다. 전통적 가치관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 바를 묻고, 또 그 현실적 응용을 도모하는 일이 지식인의 태도이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가치관은 충효의식·가족의식·명분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요즘 우리들을 우쭐하게 하는 ‘한류’(韓流)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은 한국적 가치관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적 가치관을 관통하는 흐름은 정서요, 따스함이며, 모성본능이다. 선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던 일, 퇴색한 옛 사진 속에 묻어나는 잔영(殘影)같은 그리움이 바로 한류의 근원이다. 한국인에게 가족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고향, 속은 어머니처럼 언제나 푸근함을 상징한다. 우리는 선진화를 지향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가부장적인 질서 대신에 남녀평등을 이루었고, 권위주의적 관료 대신에 봉사라는 행정이미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대가족해체를 겪었고, 지켜야 할 권위마저 쓰레기통에 처넣는 천민(賤民)주의를 보편화시키고 말았다.
물론 오늘의 혼란이 선진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적 진보는 결코 퇴보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즉 과거에로의 회귀(回歸)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차도 없애고, 전기도 끊고, 컴퓨터도 켜지 않고 살 수는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통적 가치의식 위에 미래문화를 포장하는 새로운 의식전환이 전개되어야 한다. 새롭다는 것은 없던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의 문제를 전통의 잣대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야말로 건강한 조직의 기본여건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웃이 없으면 내가 없기 때문이다.


정 병 조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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