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한 십오륙 년 전에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소설이 번역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다. 이 책은 우선 번역된 제목에서 드러나는 모호성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제목에서 ‘참을 수 없는’이란 형용사가 양 명사 즉 ‘존재’와 ‘가벼움’ 중 어떤 것을 수식하는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제목의 원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후자, 즉 가벼움을 수식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소설을 읽어보아야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인간)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쿤데라의 그 소설을 읽은 지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난 그 소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 소설의 제목을 이따금 떠올린다.
이십 명에 달하는 생명을 죽이고도 전혀 죄책감을 못 느끼는 어느 살인자의 마스크 속에 감추어진 당당한 얼굴, 보험금을 노리고 자식과 어머니가 공모하여 아버지(남편)의 살해를 시도한 패륜모자, 인간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타국을 침공하여 인간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끊어버리는 저 강대국 - 이렇듯 인간 존재를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사회에서 난 흉측한 벌레로 ‘변신’된 후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카프카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소외를 절감한다.
내가 느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렇듯 생명경시 풍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려준 고귀한 얼굴을 서슴없이 성형의사의 칼에 맡기는 외모지상주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기매매 사기를 일삼는 파렴치한, 금방 드러날 거짓말도 일단 기자들(국민) 앞에서는 진실이라고 능청맞게 지껄여대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 -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개성)을 유린하고 이렇듯 약자를 등쳐먹고 이렇듯 보통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폭행하는 권력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난 인간 존재의 가벼움에 비애를 느낀다.
이러한 존재의 가벼움 앞에서 이제 나의 인내심은 그 한계점에 도달하는 듯 하다. 그래서 나는 소외와 비애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외와 비애가 내 삶의 공간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내가 아직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저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들이 이렇듯 존재를 가볍게 만드는 세상을 부단히 고발해 대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자는 전쟁을 지휘한 장군(또는 군 통수권을 쥔 대통령)의 몫일 뿐, 승전국의 병사들조차도 패자일 뿐임을 고발하는 브레히트 같은 작가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기쁨을 찾는다.
인문학이 외면당하는 시대에 내가 인문학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쟁을 제일 원리로 삼는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상생의 세계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인)문학 속에 있다는 신념, 이것이 오늘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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