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달력이 당그랗게 한 장 남았다. 젊었을 때는 지겹게도 나이를 안 먹더니 요즘은 세월이 깃털처럼 가볍게 흘러간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열심히 가르치지도 못한 채 또 한해를 흘려보낸다.
늘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아쉽고 섭섭하지만 그래도 세월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 올 한해 서운했던 일, 나쁜 기억들을 망각의 늪에 묻고 싶다.
서로를 미워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버린 지금, 우리 사회는 좌절과 절규로 얼룩지고 있다.

달라이라마가 남긴 가르침

최근 달라이라마는 인상적인 법문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중국정부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달라이라마는 현존하는 불교 지도자 가운데 가장 폭넓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열 일곱살 때 포탈라궁을 떠나 정처 없는 망명생활로 들어섰다. 히말라야의 기슭 ‘다람샤알라’라는 곳에서 5만명의 티벳 난민들과 함께 기약 없는 국토수복과 광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무력에 의한 독립투쟁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두 번 만났다. 첫번째 만남은 지금부터 꼭 10년 전 우리나라에 불교방송국이 개국할 때 그를 초청하기 위해 찾아가 이루어졌다.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담백하다는 점이었다. 허세도 없었고, 지적 오만도 없었다. 내가 동국대에서 왔다고 하자, 자신이 기증한 티벳 대장경을 열람하는 학생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불교의 핵심은 자비입니다. 흔히 베푸는 행위를 연상하지만, 남을 미워하지 않는 일도 자비입니다. 남을 위하지는 못할망정 해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그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너무 관념적인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곤 한다.

미움 거두는 일도 ‘자비’

두 번째 만남은 인도 델리에서였다. 한국 불교신자들이 아예 비행기를 전세내서 달라이라마 친견법회를 가졌다. 나는 그때 통역을 맡았다.
“용서하십시오. 미움은 미움을 낳습니다. 용서만이 오늘의 역경을 이겨나가는 첩경입니다.”
난해한 법문을 기대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명쾌하고도 간결하였다. 그의 매력은 솔직함과 의연함에 있었다.
나는 만약 그가 한국을 방문한다면, 그를 철책선 남방한계선에 모시고 싶다. 싸늘한 북녘 땅을 향해 환한 웃음을 남기게 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끝없이 타인을 미워하는 일에만 쏟는 것은 아닐까. 용서하는 마음이 넓어질수록 그 사회는 건강해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바로 용서하는 종교이어야 한다. 그리고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용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