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라보면 어떤 인물상으로 비쳐질까.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의 문제에 가장 진지했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조선후기는 대중적으로 인기없는 시대이다.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지주-전호제’의 극대화된 모순 때문에 사회가 분열하고 국가의 존립기반조차 무너지던 시대이다. 국가는 더 이상 백성과 나라를 끌고 나갈 기력도 비젼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당시의 일부 뜻있는 학자들은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고 우리 국가와 민족이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그러한 노력들이 훗날 ‘조선후기의 실학’으로 불리우는 새로운 학문사조로 정립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이 조선 실학의 최고봉임은 주지의 사실로, 그에 대한 연구도 ‘한우충동’을 일컬을만큼 아주 많다. 그렇게 유명한 정약용에 대해서 본고와 같이 짧은 글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주저하면서도 꼭 전하고 싶은 대목이 있었기에 본고의 주제로 삼았다. 정약용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주장한 것과 더불어 당시 중국의 최신 학문이었던 고증학의 대가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러한 학문 사상적 바탕 위에서 매우 실천적이며 실용성을 극도로 중시하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 중에서도 개혁사상가로서의 정약용의 진면목은 ‘정전제’의 취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즉 현대어로는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여 토지공유제를 실현하자는 토지제도 개혁론을 주장한 일련의 글에서 볼 수 있다.
필자는 다산 정약용을 읽으면서 고상하고 품격높은 글에서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세태에 대해서 얄미울 정도로 꿰뚫고 있는 ‘빠꿈이’적인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 조선 후기 국가와 사회의 기강이 무너져서, 힘있는 자들은 갖가지 탈법과 편법으로 국가에 내는 조세를 포탈하거나 그 부담을 전호(소작인)에게 떠넘기기 일쑤여서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모순은 극에 달했다. 정약용은 가진자들의 조세포탈 수법에 대해서 정통하였다. 지주의 조세포탈은 국가재정을 열악하게 만들며 전호계층을 기아상태로 떨어뜨려서 사회를 분열시켰고 이윽고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탈세수법을 조사하고 고발하였다. 조선의 점잖은 선비가 어찌 그다지도 세태에 밝을 수 있었던가. 그로 하여금 ‘빠꿈이’가 되도록 만든 것은 다름아닌 현실을 아프게 여기는 마음과 그것을 고쳐보겠다는 열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즈음의 부동산 투기 방지책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있노라면 새삼 고심하는 정약용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