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말투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이 일본 여성을 나는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한때 열심히 보던 사진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책이나, 도쿄나 오사카에 갈 때마다 들르던 전시장의 사진 속에서였을 것이다. 풀어헤쳐진 차림을 하고 어쩌면 기묘한 자세로 결박되어 있었을 그의 무심한 눈빛을, 나는 분명 마주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 ‘카오리’는 대단히 낯설다. 아니, 솔직히 그의 이름을 궁금해한 기억도 없다. 아라키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은 그저 한 장의 사진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몇 년 후 카오리가 사진 속에서
마당귀 흔들리는 고목 감나무 그늘에 햇살 들었다 말다 하는, 시멘트 바닥 한 줌 깨져 나간 자리차진 흙 몇 줌 옮겨오고, 울퉁불퉁, 애기주먹만 한 돌멩이 몇 알로 쬐그만 우물 모양 동글게 경계 짓고,그 속에, 백일홍 그늘에 치여 키만 멀쑥하니 희멀개진 채송화 두어 녀석 데려와 앉혀놓고 만세, 불렀는데 심심한 날에 낡은 우물에 얼굴 비추듯 쪼그려 앉아 찬찬히 그 속을 들여다보니언제 날아왔는지, 배암초 떡 벌어진 어깨들이 그 비좁은 방을 다 차지해버려근근이 친 채송화 새끼들 핏기 하나 없는 누런 얼굴들, 일렬로 줄지어 모가지를 쑥 빼들
2018년에 가장 핫했던 키워드 중 하나는 ‘소확행’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일,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들, 정결한 면 냄새가 나는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이 단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삶은 메마른 사막과도 같다’는 유명한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삶의 질감을 변화시키는 것들은 항상 미시적인 지점으로부터 발생한다. 소확행 열풍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대중들의 소
정지용의 시집 한 권에 얼굴을 환희로 물들였던 청춘. 특정의 이념보다는 삶의 가치가 중요했던 독립운동가. 계절의 움직임과 별 그리고 바람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시인. 흑백의 스크린 위에 그려진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선 윤동주의 뒷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가 짊어졌던 절망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움이 서사의 주된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송몽규’는 앞모습이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교토 제국대에 입학할 만큼의 수재였으나 문학과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다. 오로지 민
은 의젓한 조카딸 경언과 난봉꾼 삼촌 재민이 벌이는 좌충우돌 코미디 드라마다. 두 인물의 액션과 리액션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다. 하지만 그 코미디가 거대한 모순을 뒤덮으려는 장치로 활용되기에 이 영화는 다분히 문제적이다. 그 거대한 모순이란 바로 ‘가부장제로의 회귀’다. 경언은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 재민을 만난다. 재민은 형의 보험금을 노리고 경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형이 꿈에 나와서 너를 잘 보살펴 달래”라는 재민의 황당한 술수를 똘똘한 경언은 금세 간파한다. 하지만 사기꾼
오랜만에 방문한 영화관에서 흥미로운 광고 한편을 보았다. 다급하게 응급실로 실려 오는 한사람, 의료진은 그를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그 후 심 정지를 알리는 기계음과 함께 ‘여러분의 관심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싸이월드’라는 자막이 나온다. 순간 영화관은 싸이월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오랜 기간 대중의 관심을 잃었던 싸이월드는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뿐만 아니라 삼성에서는 지난해 싸이월드에 50억원이라는 돈을 투자했다고 한다. 물론 여러 사업적 판단이 깔려 있었을 것이나, 거기에는
귀뚜라미 소리가오늘따라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그 동안 내가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내가 나를 견디는 동안눈을 닦아도 산빛은 어둡고강물은 먼데로만 흘러가꽃지는 소리조차 듣지 않았다 모든 소리는 대체로 비명같아어느 때 메아리를 남기는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이곳에서 제일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들고이곳에서 제일 아픈 소리는 귀로 든다고귀는 소리로 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귀뚫은 듯, 귀뚫은 듯그 소리 들으려고이렇게 자꾸 불러보는 것이다 부산 출생1965년 현대문학 등단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마음의 수수밭』,
일반적인 로드 무비(road movie)는 주인공의 변화와 자각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 도주, 방랑 등을 통해 주인공은 전에 없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자신과 주변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사유한다. 이러한 번뇌와 깨달음의 서사는 관객들에게 단순한 관람의 즐거움을 넘어 주인공과 함께 성장했다는 체험의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는 보통의 로드 무비와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영화는 그러한 장르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미소(이솜)의 성장을 담아내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미소가 거쳐 가는 인물들의
선언한다나는 어떤 삶의 연대기에서도 유파가 없었다색채로 행동한다간소한 방에서 세속적인 기도를 하며뭉쳐진 두상의 효능에 대해 생각한다주검이 다시 생즙이 될 때까지어떤 효험을 견디는 구체화로 핀다공터라는 지면은 방사형의 구호가 필요한 곳쉽게 볼 수 있다는 여러해살이의 톱니들이중심뿌리를 더 곧게 세운다영토를 생각한다나는 어떤 경로로든 소유를 주장한 적 없다그늘을 지나 양지를 점거할 뿐이다가장 넓은 분포로 야생이라는 독립을 선언하며무기력한 이파리의 저항에 대해 생각한다잎이 약이 될 때까지 뿌리가 약이 오를 때까지어떤 뿔을 견디는 영양으로
전태일 열사 47주기 하루 전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작년 11월 12일 아침, 잠에서 깨어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몇 시간 전에 그들이 또 굴뚝 위에 둥지를 튼 소식을 봤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높이 굴뚝 위. 집에서 직선거리로 1.6km 떨어진 곳. 파인텍 노동자. 아직 이 이름은 낯설다. ‘스타케미칼’이나 ‘한국합섬’이 여전히 입에 익은 이름이다. 박준호와 홍기탁. 두 명의 노동자가 굴뚝 주위를 감싼 사다리를 타고 힘겹게 올라갔다고 했다. ‘한국합섬’일 때 처음 만난 이들은 다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상경투쟁 중이었
2017년 TvN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던 에 이어 최근 가 방송사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에 등장했던 발리 근처 작고 평화로운 섬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듯, 는 ‘영원한 봄의 섬’ 스페인 가라치코의 따뜻한 풍경을 브라운관 안에 담아내었다. 한적한 소도시에서의 여유를 꿈꿀 수 있는 그곳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들기 위해 4명의 스타들은 자그마한 한식당을 오픈한다. 식당에서 손님들은 김치전과 잡채를 주문하고 흥미로운 듯 쇠젓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다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헐거운 매듭을 만지작대며 답을 미룰 수도 있다 나는 지금교외로 향하고 있다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굼뜨고창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다 이상하리만큼아름다워서 슬며시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괴성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질 때까지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엉클어진 시간을 풀 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아무 바닥에나 던져 버릴 수도 있다오래 벼린 칼이 있고 마침 칼은 가방 속에 있고 나는 지금교외로 향하고 있다 끈과 칼은이상하리만큼
4년이 지났다. 배가 가라앉은 지. 그 사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짧게 표현했지만 한 명의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된 뒤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동안 안 그래도 역동적이라는 이 나라엔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그걸 보고 듣고 겪어 온 우리들의 기억과 감정은 그 격변 속에서 또 얼마나 날카로워졌을까. 혹은 무뎌졌을까.큰 배가 서서히 가라앉고 많은 사람들이 팽목항으로 달려갔을 때 가지 않았다. 다른 참사의 현장, 765kV 송전탑이 세워지던 밀양에 자주 가던 때였다. 연이은 참사에 단련
바닷물 속에는 아직 태풍이 되지 못한 복통이 있다 사막은 무턱대고 걸어나온 해변이라서 언젠가 사막까지 파도는 바다를 옮겨갈 것이다 그것은 태풍의 이야기 바다의 복통이 모래바람이라서 그것은 몸속이고 꿈 속 같아서 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누구도 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한번 뛰면 어떻게든 멈출 수는 없고 긴 삶의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또 꾼다 자고 또 자도 드러나지 않는 바닥에 오래 누워 있다 복통 속에는 어느 순간 바람을 잃은 태풍의 눈이 남아 있어서 몸 밖으로 열린 잠의 창문이 달려 있어서 깜빡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과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나는 아마 고향에 내려가 사진들을 불태우며 그간의 삶을 돌아볼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익숙한 장소를 여행하며 통장의 잔고를 거덜 낼 것이다. 평소 아니꼽게 여기던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미안한 사람을 찾아가 읍소할 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끝을 실감한 이상 새로운 일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랑을 시작하는 소녀
4년 전 5월 어느 새벽, 인적이 없는 밀양 산속에서 할머니들은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전 직원들한테 포대에 싸여 실려 나왔다. 밀양 곳곳에 세워지는 765kV 송전탑을 막으려는 안간힘이었다. 그 송전탑으로 흐르는 전기를 쓸 사람들은 대부분 산속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 관심도 없는, 밀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권 사람들이었다. 날마다 산속에서 들에서 논에서 갖은 치욕을 당하면서 괴물 같은 송전탑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송전탑들은 들어섰다. 사시사철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자신의 논과 밭에서 그 거대한 쇳덩이를 바라보고 살 수밖에
11월이다. 겨울 찬바람 맞아가며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일이 벌써 1년 전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힘이 바로 광장의 인민들에게 있음도 확인했다. 함께 ‘민주 공화국’을 노래하던 혁명의 시간에는, 어쩌면 법전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헌법제정권력’임을 실감했는지도 모르겠다. 탄핵 이후 광장의 열기는 빠르게 제도정치로 옮겨갔고,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는 개헌 논의로 구체화되고 있다. 국회는 내년 2월까지 개헌안을 마련하고 2018년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안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정치권의 관심사인 권력구조개
바람에 이마를 맡겼어 낮아지는 먼 바다와 뒤섞이는 눈 결정들의 소용돌이 안에서, 다섯 둘 그리고 하나 장갑 속 손가락이 사라지고 있었지 한쪽 어깨부터 무너지고 있었어 너무 모자라서 늘 많은 걸 증명해야 했지 더 많은 걸 증명하려고 나는 모든 걸 미워했어, 밤, 가로등, 교차로의 자동차, 이렇게 작은 사람들, 깊이 감춰둔 흑단 상자 속 얼룩진 그림책이 펼쳐지고, 집이 올라오고 굴뚝에선 연기가 흘러나오고, 그런 풍경은 책에서만 본 것 같은데, 빈티지 헌팅캡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영원히 눈보라 하늘을 올려다보고만 싶었지 입술 빛이 흐려지
요즘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만큼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보니 카페에 가서 장시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이른바 ‘카공족’이다. 풀이를 하자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인데 좋은 의미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카공족은 짧게는 2~3시간 길게는 10시간 넘게 카페에서 공부를 한다. 이런 카공족에게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공부를 했을 뿐인데 왜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인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카공족은 여전히 카페에 간다. 그
87년 민주화를 이은 89년 해외여행 자유화와 함께 한국사회의 여행이 시작됐다. 1990년 156만 명으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은, 2016년 2238만 명으로 늘어났다. 외환위기가 찾아왔던 97, 98년과 서브프라임발 금융위기가 덮쳐왔던 08, 09년을 제외하면 해외여행객은 매년 증가했다. 2016년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가면서 쓴 여행비용은 26조 8486억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국내여행 비용이었던 25조 7480억여 원을 넘어선다. 이미 2001년 이후 한국의 관광수지는 계속해서 적자였다. 물론 국내도 여전히 만